내 친구 숙진이, 박숙진
종이를 가든 채운 메시지는 오디오북을 끼고 사는 그다웠다. ‘당신의 모든 문제에는 해결책이 있다. 그냥 하면 된다.‘ 고작 포스트잇 한 장에 온 정성을 들이는 것을 보고 이미 마음 먹고 있었지만 또 한번 마음을 새로고침했다. 나 역시 그가 어떤 작은 부탁을 하더라도 성의를 다하리라.
# 서울
결혼과 함께 남편을 따라 올라간 서울. 곧 아이가 들어섰고 집 앞에 있는 임산부 요가반을 등록했다. 거기서 명랑한 복숭아빛 바지를 입고 사랑스러운 머리띠를 한 그를 만났다. 붙임성이 좋은 그를 중심으로 배가 불뚝 나온 임산부들끼리 같이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그렇게 평화롭게 지냈다. 곧 불구덩이가 기다리고 있는 줄 모르고. 남편의 모든 것이 이상하고 희한하고 기괴했다. 어느 날은 그의 손을 물끄러미 보는데 문득 무섭고 두려웠다. ‘저 손으로 밖에서 얼마나 나쁜 짓을 할까.’ 이쯤되면 갈라서는 게 맞지만 아직 서른이 되지 않은 나는 용기도, 배짱도 없었다. 그때 숙진이가 내 얼굴을 읽었다.
- 미리야 무슨 일 있어?
- 아니, 어, 시아버님이 조금 아프셔.
몸도 마음도 물기라곤 없었다. 죽고 싶지만 그럴 용기는 없어서 빨리 늙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때였지만남편 욕만은 하기 싫어서 둘러댔다.
# 경주
그렇게 나는 서울 생활을 2년을 못 채우고 원래 살던 울산으로 내려왔고, 숙진이는 포항으로 왔다. 서울 토박이 그는 남편이 아버님의 사업을 물려받아야 한다는것을 결혼 전부터 알고 있었고, 둘 다 지역으로 내려오는 시기가 비슷했다. 나는 자식일이라면 불구덩이라도들어갈 여느 부모들처럼, 다정한 부모님이 주시는 사랑과 애정으로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 같은 일상에서 조금씩 땅에 디딜 힘을 마련해 나갔다. 그리고 그는 큰 사업을 물려받은 남편 내조에 세 아이의 엄마로 자신의 길을 닦아나갔다. 그렇게 그와 나는 각자의 일상을 새롭게 꾸려나가기 시작했고, 울산과 포항의 중간인 경주에서 자주 만나 아이들이 커가는 것을 같이 보며, 서로의 웃음과 눈물을 공유했다.
- 우리 아버님이 경주에서 전시회를 하셔. 붓글씨를 오랫동안 하셨거든. 너 올래?
어느 주말, 경주의 한 호텔을 찾았다. 울산배로 만든 디저트를 미리 주문해 차에 실은 채 가면서 실은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전시회라고는 하지만 그저 여유 많은 어르신이 쉬엄쉬엄 붓을 쥐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런데 호텔 로비에서부터 어느 붓글씨 대회에서 수상한 작품들을 전시해 놓은 듯한, 수준급의 수많은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아버님은 붓글씨를 무려 10년을 하셨다고 한다.) 거기에 친구 시아버님이 걸어오신 길을 짐작할 수 있는 특허받은 상장, 책으로 나온 아버님의 자서전, 지역 정치인의 축하인사가 수록된 브로슈어가 보였다. 클래식 공연팀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뷔페가 마련된 홀 앞에는 내 생전에 이렇게 많은 꽃을 또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수많은 화환들이 끝도 없이 세워져 있었다. 무대 바로 앞 센터 좌석에 ‘며느리 박숙진’을 만나자마자 호들갑을 떨었다.
- 니 김건희 같다. (지금 생각하면 다른 이름을 올려야 했다)
- 조용히 하고 뷔페나 먹어.
친구 시어머님의 친구분들이 아닐까 싶은, 할머니들 몇몇 분이 앉아계신 탁자가 보였고 비어있는 의자에 가방을 두고 음식을 가져왔다. 친구는 내가 신경이 쓰였는지 몇 번을 들락날락거리며 곁으로 왔다가곤 했다. 그 모습을 같은 테이블에 있는 할머니 한 분이 계속 보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 이 집 며느리 친구 되는 갑따 그죠?
- 네, 친구 됩니다.
- 이 집이 될 집구석인기라. 며느리 잘 봤다고 소문이 났다 아이가. 나도 한번 집에 간 적이 있는데, 손도 빠르고 어찌나 잘하는지. 되는 집구석인기라.
소름이 돋았다. 친구의 칭찬을 듣고 기분 좋은 건 잠시,애틋함이 올라왔다. ‘며느리 잘 봤다고 소문이 났다’는 말을 듣기까지 ‘며느리 박숙진’은 얼마나 애를 썼을까. 나는 회사 국장이나 팀장한테 ‘그 작가 잘한다고 소문났다’ 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숙진이는 이십 년 가까이 이만큼 잘 나가는 집안이라는 걸 단 한번도 내비친적이 없다. 작년 연말에 둘이서 조촐한 연말파티를 했고, 그는 그다운 고백(?)을 했다.
- 나 올해 책 100권 읽기 성공했다.
눈이 동그래진 나는 최근까지도 그에게 재미있는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한다. 청예 <오렌지와 빵칼>, 정소연 <발달은 느리고 마음은 바쁜 아이를 키웁니다> 역시는 역시였다. 감정의 질감과 마음의 결이 비슷한 누군가가 있다는 건 분명 기나긴 인생의 큰 선물. 다정하고 안온하고 아늑한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