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네 번째 : '할 수 있어요.'

헬스 트레이너 사막여우

by 김밀

(사생활이 포함돼 있어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


손글씨를 부탁했던 이들 중에 20대 최연소. 토끼, 다람쥐, 사막여우까지 귀여운 동물이 생각나는 귀엽고 앳된 그는 ‘열심히 살자’를 말한다. 후회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이보다 어려운 일이 있을까.


누군가 나이가 드는 건 박탈의 과정이라고 했다. 주말만 되면 침대에서 나오지 못하다가, 매가리 라고는 없는 일상을 간신히 이어가다가, 결국 먼지가 돼서 풀풀 날아다니기 직전에 동네 헬스장 세 곳을 돌았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헬스장 세 곳을 돌아보고 강사, 시간, 수강료 삼각형이 가장 덜 찌그러지게 그려지는 곳으로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첫 번째 헬스장은 강사부터 탈락. 이름과 전화번호 등을 묻는 회원 가입서를 내민 여자 헬스 트레이너의 짙은 화장이 부담스러웠다. 그날 남자친구와 데이트가 있었는지는 모르나, 화장과 운동은 피자와 소주처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진 나로서는 ‘나의 트레이너’는 담백한 맨 얼굴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헬스장은 강사도, 헬스장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보통 직장인들이 출근하기 전인 오전 6시, 7시 수업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고, 무엇보다 남자 트레이너 ‘혼자’ 운영하는 것에 많은 점수를 줬다. 헬스장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보였고, 꽤 오랫동안 1인 가게로이어가고 있는 건 적어도 여러모로 게으르지는 않다는것이다. 3년째 혼자 논술 학원을 운영하면서 알게 된 세상의 이치. 그런데 시간이 맞지 않았다. 일주일에 두 번은 다니길 원했으나, 수업시간에 여유가 없어 한번만 가능했다. 그래서 또 탈락.


마지막 세 번째 헬스장에서 머리를 한 갈래로 바짝 올려 묶은 발랄한 포니테일을 한 지금의 강사, 그를 만났다. 운동을 하다 보면 1세트와 2세트 사이, 동작과 또 다른 동작 사이에 잠시 쉬곤 한다. 그럴 때마다 그와 나는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리세요’ 같은 뻔한 이야기, 날씨나 드라마가 아닌 마음속의 이야기를 정직하게 주고받는다.


그의 휴대전화 바탕 화면의 중년 남성을 보고 누구냐고 물었을 땐, “우리 아빠요. 돈 많이 벌어서 아빠한테 드리고 싶어요”라는 답변을 듣기도 했고, 그가 갑작스럽게 당일 수업을 미룰 때는 명확하고 솔직하게 상황 설명을 풀어냈다.


- 회원님. 어젠 정말 죄송했어요. 혹시 ‘뇌전증’이라고 아세요? 어머니가 뇌전증이 있으세요. 어제는 강아지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가 갑자기 쓰러지신 거예요. 그래서 전화를 받고 병원 응급실로 간 거고요. 그런데 처음 있는 일은 아니고 저한텐 어릴 때부터 익숙한 일이에요. 어떻게 저한테 연락이 왔냐고요? 이런 일이 있다보니 어머니 폰 바탕화면에 제 번호를 적어놨어요.


한 날은 헬스장을 옮길 것 같다며 나에게 같이 가겠냐고 물었다. 다행히 집과 그리 멀지 않았고, 합이 맞는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곤 8개월째 그에게서 ‘죽을 것 같다’고 하면 ‘죽지 않아요’라는 말과 함께 ‘이 말’을 듣고 있다. '할 수 있어요.' 동작을 할 때마다 늙고 병든 술주정뱅이가 오한이 든 것처럼 몸을 바들바들 떨어대면 그는 늘 이렇게 외친다.


- 할 수 있어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종종 대머리 노총각 치과 의사가 생각난다. 예전에 동네 치과를 다닐 때 대머리 의사가 있었는데, 나는 그가 참 좋았다. 입을 벌려야 할 때마다 ‘아~’라고 말을 하는 그가 무척이나 다정스러웠다. 정확히는 ‘아앙~’이었다. 첫 번째 ‘아’는 낮은 톤으로, 두 번째 ‘앙’은 앞의 ‘아’보다 높은음으로 길게 뒤를 빼서 ‘아앙~’이 되곤 했는데 신기하게도 그가 아앙~이라고 할 때마다 잔뜩 힘이 들어간 몸이 나른하게 풀리곤 했다.


그의 ‘할 수 있어요’도 묘한 억양이 있다. ‘할’에 힘을 줬다가, ‘수’는 가볍게 낮추고, ‘있어요’는 크레셴도가 되면서 ‘요’를 꽁지처럼 늘린다. 근육을 저축하기 위해 통증과 아픔을 견디는, 나에게는 귀하고 반가운 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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