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bc울산방송 문화사업국 이정호 국장
- 여기서 말고 내 자리 가서 (손글씨) 써서 보내줄게.
- 그렇게까지 할 거 아니에요. 편하게 써주세요.
그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의 뒤통수에다가 소리를 질렀다.
- 죄송해요 국장님. 쉬러 오셨는데.
일 년에 한두 번쯤, 2층에서 일하는 그는 8층에 있는 나를 찾아온다. 이유나 용건 없이. 달아오른 얼굴로 나타나거나 소파에 털썩 앉는 모습을 보이거나 건물 꼭대기 8층 통유리창을 바라보면서 ‘좋다’, ‘여긴 이해관계가 없잖아’ 같은 말을 띄엄띄엄 내뱉곤 하는데, 그런 그를 볼 때마다 내가 보인다. 무언가 일이 풀리지 않거나 동료와 대화가 꼬일 때 개짜증 나는 내 모습이.
- 국장님. 차 한 잔 드릴게요.
- 됐어.
- 한 잔 말아드릴게요. 작두콩차 드셔보세요. 비염에 얼마나 좋은데요.
지금은 사업국 국장이지만 그는 제작팀 피디로 오랫동안 일했다. 당시 그를 둘러싼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는데,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작가를 말려 죽인다는 것이고, 그 방법으로는 다 정해놓은 걸 엎고, 또 정해놓은 걸 엎는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엎는다’가 중요한데, 회사에 한 명씩 있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프로그램을 잘 만들려는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누구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그는 회사에서 인정을 얻었고, 어딘가에서 주는 상을 받았고, 작가는 말라죽어갔다. 반면 그가 피디였을 때 티브이 작가로 일했던 나는 살이 포동포동 올랐다. 그와는 일을 같이 하지 않은 덕분에. 지금까지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큰 비결이기도 하다.
얼마 전, 식사 자리가 있었다. 우리 편은 국장과 사업국 피디 그리고 라디오 건강정보캠페인을 맡고 있는 나였고, 상대는 지역에서 꽤 규모가 있는 병원에서 제법 중책을 맡고 있는 담당자였다. 셋이 먼저 자리를 하고 있었고, 나는 라디오를 마치고 조금 늦게 도착을 했다. 칸칸의 방으로 돼있는 한정식집 한 방의 미닫이 문을 들어서는데 병원 담당자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
백남봉. 어릴 적 티브이에서 봤던 코미디언 백남봉 아저씨와 닮은 얼굴에 원래 이마가 넓은 건지, 탈모가 시작된건지, 둘 다 인지는 모르겠으나 윤기 나고 넓은 이마를 가진 백남봉과 밥을 먹었다. 국장과 피디가 한 편에 앉고, 병원 담당자의 옆자리에 내가 앉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먹기 민망하고 성가신 간장게장 게다리처럼 불편했다. 무슨 대화를 한 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잘난 척에 특정 대상이나 누군가를 향한 업신여김이 종종 묻어 나왔다. 그러다 백남봉은 앞쪽에 앉은 피디를 향해 잘생겼다는 말과 함께 결혼을 했냐고 물었고, 피디는 했다고 대답했다. 또 그놈의 결혼타령이구나 싶었는데 뭐, 거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옆쪽에 있는 나를 보면서 대뜸 한마디를 날렸다.
- 결혼... 하셨죠?
백남봉은 우리나라 인구 조사원이었을까. 1인 가구인지 4인 가족인지,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 집에 김치냉장고가 한 대 있는지 두 대 있는지, 그게 다시는 안 볼 사이에서 왜 궁금할까 싶었다. 거기다 ‘결혼하셨나요?’도 아닌 ‘결혼... 하셨죠?’는 ‘너 늙어 보인다’와 동의어가 아닌가. 결혼 뒤에 1,2초 쉬는 것까지 완벽하게 기분이 나빴다. 바로 앞에 있는 멸치볶음에 젓가락을 뻗으면서 ‘네’라고 짧게 대답했지만, 곧 후회했다. ‘네 결혼했다가 이혼했습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말할걸. 백남봉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한창 밥을 먹고 있는 피디와 나를 향해 상견례에서 시아버지가 될 분이 할법한 말을 내뱉었고, 나는 또 후회하지 않기 위해 말을 받았다.
- 체면 차리지 말고 먹어요.
- 체면 같은 건 차리지 않습니다.
자리를 파하고 으레 카페에 가겠거니 했는데, 식당에서 바로 흩어졌다. 그리곤 국장에게 전화가 왔다. ‘니 얼굴을 보니까 카페 못 가겠더라. 나야 사람 만나는 게 일이라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있구나 하는데, 네가 이해해라.‘ 맞은편에 앉은 국장은 삐죽 대는 내 얼굴을 고스란히 보고 있었다. 한 차로 가는 피디에게 ‘외부 사람 만나는 자리에서 저거는 왜 저래’라고 욕을 해대고 끝내버리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밥 먹는 내내 기분이 태도가 되는 늙은 작가에게 욕지거리 대신 전화를 걸어왔다. ‘오늘 고생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죽을죄를 지은 것 같아 ‘죄송하다’를 반복했다. 그에게 너무 미안해서 심장이 납작하게 말라 붙는 것 같았다. 그는 여러모로 작가를 말라죽게 만든다. 새삼 그가 쓴 손글씨를 본다. 브런치 구독자가 6명이라고 했는데도, 행복과 사랑과 꿈을 손글씨로 꾹꾹 눌러 담아, 사진 구도도 예쁘게 해서 보내준 그를 위해 또 차를 대령할 것이다. ‘국장님, 언제든 한 잔 말아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