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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쏭쏭 Apr 08. 2023

할아버지는 내게 작약을 던졌다

베이비파우더를 사고 싶은 할아버지

  마트에서 근무할 때다. 낯선 할아버지가 방문했다. 지역색이 짙은 곳이라 낯선 사람은 금방 눈에 띈다. 보통 낯선 사람은 젊은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낯선 할아버지라니... 뭔가 심상치 않았다. 나는 살짝 긴장하며, 유심히 할아버지를 살폈다.


  할아버지가 마트 이곳저곳을 구경하시더니,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여기, 분은 없냐?"


  분? 내가 아는 그분이 맞나? 문맥상 그 분이 맞는데... 내가 모르는 다른 분이 있나? 예전에 할머니가 '포리약'을 찾았을 때 헤맸던 기억이 났다. 내 당황을 읽은 할아버지가 버럭, 하며 설명을 이었다.


  "얼굴에 바르는 분-말이여!"


  내가 생각한 그것이 맞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없다고 대답했다. 노인 인구가 대부분인 이곳에서 마트에서 분을 파는 건 어불성설이다. 할아버지는 분노했다.


  "그게 얼마나 좋은 건데 안 가져다 놔! 땀띠 났을 때도 바르면 얼마나 좋은데!"


  할아버지는 손등에 분을 바르는 흉내까지 내며 열성이었다. 베이비파우더를 땀띠 났을 때 바르면 좋다는 말을 어딘가에서 들어본 것도 같았다. 아기들 엉덩이에도 톡톡 발라준다고... 할아버지는 왜 그 좋은 분을 안 가져다 놓냐며 계속해서 화를 냈고, 나는 아기의 하얗고 포동포동한 엉덩이를 상상하면서 그 시간을 견뎠다. 할아버지는 꼭 가져다 놓으라며 화를 내시고 떠났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다시 왔다. 이번에도 마트를 한 바퀴 돌고 난 뒤, 갑자기 내게 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마트에 쌓인 게 많아!"


  그리고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물쭈물거리며 긴 이야기 끝에 할아버지는 눈물까지 글썽였다. 어른. 그것도 남자 어른의 눈물이라니.... 내 안의 유교걸이 불편함을 호소했다. 제삼자여도 곤란한 상황인데, 심지어 고객님이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 걸까? 나는 내가 울고 싶다고 생각했다.


  며칠 뒤, 할아버지가 또 왔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나는 이제 할아버지가 내게 무슨 이야기를 할지 두려울 지경이었다. 할아버지는 이번에는 마트를 돌아보지도 않고, 내 책상 위로 시커먼 비닐봉지 하나를 집어던졌다.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것이 최선이었다. 다행히 나 스스로 봉지를 열어봐야 하는 무서운 일은 없었다. 할아버지는 봉지를 묶지 않았고 그 결과 입이 벌어져 내용물이 보이는 상태로 내 책상에 떨어졌으니까.


  거기엔 활짝 핀 작약이 들어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걸 구했을까? 매끄럽지 않은 절단면을 보면 분명히 어디서 뜯어온 건데.. 이부근에 이렇게 예쁜 작약이 있었던가? 시골살이와 대도시 생활을 하며 아는 건 쥐뿔도 없으면서 눈만 높아진 나였는데.. 이건 그냥 봐도 보통은 아니었다.


  그 엄청난 자태!

  주먹 두 개를 합친 것보다 큰 꽃송이에, 혼자만 명도를 최대로 올린 것 같은 색감까지! 겨우 꽃 한송인데, 비밀봉지가 꽉 찼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걸 구해서... 왜 내게 주는 거지? 당황한 내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할아버지는 떠나버렸다. 이 꽃을 어쩌지.. 버리기엔 너무 아깝고... 그래. 꽃은 죄가 없으니까. 나는 좋은 게 좋다는 생각을 하며, 그 꽃을 들고 사무실(창구)로 들어갔다.


  "엄청 예쁘죠?"

  "어디서 났어? 이쁘네?"


  나는 지점장님에게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지점장님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할아버지가 너 좋아하나 보다."


  성의 없는 대답이었지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정말 할아버지가 날 좋아하나? 그런데 좋아할 이유가 있었나? 나는 별다른 뭔가를 한 게 없는데?


  그것과 별개로 꽃은 지점장님이 보시기에도 좋아 보이는 듯했다. 나는 그 꽃을 물병에 담아 지점장님 책상 앞에 두었다. 할아버지는 그 꽃이 질 때까지 오지 않았다. 그 뒤로도 오지 않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후였다. 사무실에 전선이 자꾸 잘려서(..) 직원들이 숨어서 감시했는데, 전선을 자르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고 했다.


  잡힌 할아버지는 눈물을 글썽이며 직원들에게 말했다고 했다.


  "내가  여기에 쌓인 게 많아!"


  ... 아..?!! 긴가민가했던 생각에 확신이 생겼다. 그 할아버지가 맞았다. 직원들은 할아버지에게 다시는 이러면 안 된다고, 그때는 정말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다고 할아버지를 협박(!) 했다고 했다. 다행히 그 뒤로 할아버지는 오지 않았고 전선이 잘리는 일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그 뒤로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도대체 그 할아버지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무엇이 그렇게 한이 맺혀서 생판 처음 보는 내 앞에서 울었고, 지점의 전선을 그렇게 잘라야 했을까? 그리고 그 할아버지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갔을까?


  어찌 되었건 나는 이제 작약을 보면 그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어디 가서 무얼 하고 사시는지 모르겠지만, 부디 몸 건강하길. 다른 사무실의 전선은 자르지 않기를!(도시였으면 몇 번 잡혀갔습니다, 진짜) 다른 직원들을 힘들게 하지 않기를! 그리고 가능하다면, 도대체 그 작약은 어디서 구한 건지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때 본 그 작약 이상으로 아름다운 작약을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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