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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쏭쏭 Jul 07. 2024

사랑할 수 있는 이유

나는 나를 잘 안다. 내가 얼마나 게으른지, 얼마나 소심한지도, 더러운지도 누구보다 잘 안다. 예를 들어서 나는 자주 휴대전화를 보면서 밥을 먹는다. 그러다 보니 젓가락에 위태롭게 올려졌던 밥이 식탁 위로 떨어지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식사를 마치고 보면 식탁 위에 밥알이나 반찬이 어지럽게 떨어져 있기 십상이다. 주말에는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종일 쇼츠만 주야장천 보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내가 얼마나 게으른지, 한심한 짓을 하는지, 멍청한 생각을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후회하고, 내일부터는 달라져야지 하고 결심하지만, 내일의 나는 언제 그런 결심을 했냐는 듯 오늘의 나를 복제할 뿐이다. 나를 너무 잘 알아서 나를 믿지 못한다.    

  

그에 비해 타인에 대해 아는 것은 얼마나 부실한가? 나는 그가 식사 후에 설거지를 바로 하는지, 옷은 얼마나 자주 갈아입는지 모른다. 어떤 친구를 만나고, 어떤 가치관을 가졌는지 모른다. 나에 한해서 전지적 신이 된 것처럼 잘 아는 것과 달리 타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타인을 믿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토록 잘 아는 나를 믿지 못하면서 어째서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은 믿을 수 있을까? 적어도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을 믿기보다 나 자신을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를 가장 잘 알아서, 내가 싫다. 다른 사람은 좋은 사람일 수도 있고,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100% 나쁜 사람이다. 하지만 타인은 다르다. 우리는 상대를 볼 때, 그의 모르는 부분을, 새까맣게 뒤덮인 부분을 환상이라는 영역으로 덮어버린다. 잘 보이지 않는 영역을 추측과 환상으로 그려버린다. 장님이 코끼리의 코만 만지고 그 형태를 가늠하듯이, 우리는 살짝 열린 틈 사이로 은은히 세어 들어오는 빛으로 그 방을 가늠한다. 그 방의 평수, 실내장식, 청소 환경, 용도 등…. 내가 너무나 잘 아는 그 방이 아니라…. 환상 속의 어떤 방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너를 몰라서 너를 사랑한다.

  

하지만 해가 뜨고, 혹은 전등에 불이 들어와서 환해지면 방의 온전한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있다. 또 시간이 지나면 위층에서 층간소음이 나는지, 누수가 있는지, 외풍이 있는지 알게 된다. 환상은 언젠가 무너지기 마련이다. 상대의 진정한 모습이 내 환상과 같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구나. 그렇게 넘어갈 수 있을까? 내 판단이었으니 어쩔 수 없지, 하고 멋지게 넘길 수 있을까? 상대에 대한 원망과 ‘환상에 빠졌던 나’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있을까?    

 

타인을 믿는 것은 이토록 언제나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그걸 알면서도 상대를 믿는 것은 ‘환상’이 주는 아름다움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환상만을 좇고 살 수는 없다. 우리는 '나'를 책임져야 한다. 한강뷰 아파트의 관리비 문제는 우리 집 층간소음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집 천장에서 비가 새면 윗집에 올라가 그 사실을 알리고, 필요하다면 분쟁을 해서라도 문제를 해야 한다. 베란다에 곰팡이가 피면, 곰팡이를 지울 방법을 고민하고, 앞으로 방지할 수 있는 길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티브이 속 환상적은 한강 전망 아파트가 아니라 좋든 싫든 내 두 다리를 뻗고 잘 수 있는 우리 집이다. 

 

‘나’는 내가 유일하게 100%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내가 수리하고 고쳐나갈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함께 갈, 죽을 때까지 내 것일 존재.


그런 나를 믿고 의지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든든한 인생일까?


하지만 이것은 환상이다. 얼마나 거대한 환상이냐면, 이걸 기대하기보다 잘 모르는 타인이 100% 완벽할 거라고 믿는 게 더 쉽게 느껴질 정도의 환상이다. 일단 나는 오늘 100%의 확률로 누워서 휴대전화로 쇼츠나 보고 보냈지만, 그대는 어떤 멋진 하루를 보냈는지 모를 일이니까. 나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어쩌면’이 너에게는 있으니까. 너는 어쩌면 굉장히 멋진 하루를 보냈을지도 모르니까. 내 얼굴은 100퍼센트 확률로 못생겼지만(!) 팬텀 가면 속 가려진 얼굴은 흉측할 수도, 아름다울 수도 있으니까. 그런 환상이, 너를 사랑하게 한다.


그러나 돌아보면 나에게도 '환상'이, '어쩌면'이 있다. 그건 바로 '내일의 나'다. 나는 나를 잘 알지만, 내일의 나는 모른다. 어쩌면 나는 내일은 부지런해질지도? 어쩌면 내일의 나는 좀 더 상냥하고, 좋은 사람이 될지도? 그렇다. 내일의 나는 모른다. 그러니까 마치 타인의 50%를 믿는 것처럼. 확률 상 내일의 내가 달라질 확률은 50%는커녕 2%도 안 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가능성은 같은 거니까. 그런 환상으로 나를 사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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