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에 대한 사유
저는 김춘수의 시 ‘꽃‘을 참 좋아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中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내가 무언가를 인식하고 바라봐 준다면 그것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의미가 됩니다.
우리들은 수많은 사람 속에서 우연히 만나 인연을 이어나가고, 관계를 쌓아 나갑니다. 상대방을 만나면 만날수록 그 사람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알게 되고 상대방이라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상대방은 나에게 하나의 의미가 됩니다.
이는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내가 나를 마주하면 마주할수록, 나는 나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알게 되고, 나라는 사람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내가 나를 모른다는 것은 나에게 큰 관심이 없다는 말과도 같기에, 자신을 소중하게 대할 수 없어집니다.
단순하지만 자기 사랑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양한 경험을 해주어야만 합니다.
다행히 인생이란 지루하지 않게 예측하지도 못하는 다양한 변수와 문제를 우리들에게 던져줍니다.
그 경험 속에서 우리는 깨어있는 의식을 통해 내 반응과 행동을 살펴보며, 새로운 내 모습들을 발견하기도, 내 습관과 행동패턴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경험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위험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경험‘속에서 나는 나를 어떻게 알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미 해답을 알고 있습니다.
나의 감정을 인정하고 흘려보내기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나의 여러 가지 모습
내 무의식과의 끊임없는 대화
지금까지 얘기해 왔던 내용입니다.
나를 알아가는 행위는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세상 모든 것들이 영원하지 않듯, 현재의 내 모습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나를 알아간다는 것을 멈추게 되면 그것은 굳어버려 나에 대한 고정관념을 만들어버리게 됩니다. 즉, 나 자신을 틀 안에 스스로 가두는 것입니다. 컴퓨터가 잘 돌아가기 위해서는 업데이트를 꾸준히 해줘야 하듯이, 우리는 경험을 통해 생긴 나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계속해서 업데이트해주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나는 나를 이해하고, 나를 소중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로서 사랑받을 수 있으려면,
끊임없이 스스로의 모습을 관심 갖고 바라봐주세요.
그렇게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 많아지게 된다면
나의 존재만으로도
나는 나에게 하나의 의미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