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시가 흐르는 철학 카페의 책장 지기입니다.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바뀌고 있는 요즘,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있으신가요? 저는 얼마 전에 추억이 가득 깃든 대학로를 다녀왔습니다. 대학로가 몇 시간 걸리는 곳도 아닌데, 참 오랜만에 다녀왔습니다. 반복되는 지친 일상을 보내느라 잠시 그 일상을 벗어날 여유조차 없었나 봅니다. 대학로는 여전히 젊음의, 청춘의 공간이었습니다. 그 속에 있는 저도 덩달아 그 옛날의 스무 살이었습니다. 저는 대학로 하면 떠오르는 시가 있습니다. 오늘은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을 옆에 두고,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시를 음미해 보겠습니다.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 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 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 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정의로웠던 그들은 사회 부조리에 맞서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하면서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노래를 목청껏 불렀습니다. 그때 그들은 그랬습니다. 돈이 되지도 않는 정의를, 민주주의를 고민하면서 밤새 열띤 토론을 했습니다. 항상 초췌했던 그들이지만, 그들의 눈과 얼굴은 열정으로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그들에게는 아우라가 풍겼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대가 의미를 가지고 사는 한 그대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아우라는 의미 있게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었고, 그 몸부림으로 지금 시대의 민주주의를 이끌었습니다. 빛나는 아우라를 풍기는 그들의 모습은 다음 세대에 ‘멋짐’을, ‘존경심’, ‘삶의 지향점’을 각인시켰습니다.
저는 1992년 대학교 1학년 때 선배를 따라 한양대에서 열린 전국대학생대표협의회(전대협)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석했습니다. 어떤 모임인지, 그곳에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냥 멋진 선배를 따라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그 공간의, 모든 풍경이 지금도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온 수많은 대학생의 함성과 그보다 더 뜨거웠던 열정. 그날 처음 들었던 ‘님을 위한 행진곡’. 그곳의 모든 것들은 대학 입시를 위해 달달 외웠던 활자화된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보고, 듣고, 만지고, 고민하는 지식이자 지혜였습니다. 교사인 꿈만을 좇아 앞만 보고 달리던 나와는 다르게 또 다른 청춘들은 대의를 위해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함성에, 그들의 뜨거움에 제 마음도 함께 뜨거워졌습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
웅장하게 흐르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가슴이 벅찼습니다. 뜨거운 무언가가 자꾸 목구멍에 차올랐습니다. 밤새 우리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해 열띤 토의를 했습니다. 혜화동 로터리는 아니지만 한양대 운동장에서 밤새 목청껏 노래를 불렀습니다. 우리의 청춘은 그렇게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그래서인지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시를 보면 그날이 떠오릅니다. 찰리 채플린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우리가 겪은 어려움조차도’라고 말했듯이 그렇게 뜨거웠던 스무 살의 열정이 지금은 희미한 기억으로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매번 이 시를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 소시민적 삶에 대한 부끄러움, 과거와 현재의 대비 등만을 지껄입니다. 그들의 뜨거웠던 열정을, 한양대에서 제가 느꼈던 뜨거웠던 열정을 감히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진한 에스프레소보다 더 진했던, 뜨거웠던 스무 살의 그날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이제는 비록 한없이 뜨거웠던 열정이 희미해져만 가는 기성세대이지만, 정의로운 사회를 우리가 지금보다는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대한민국을 소망했고, 지금도 소망하는 기성세대이기에 오늘은 스무 살의 열정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스무 살은 어떠셨습니까?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 때문인지 오늘은 추억이 그리움으로 아련해지는 목요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