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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랏말싸미 Nov 30. 2023

넷째 장은 가장의 무게입니다.

  안녕하세요? 시가 흐르는 철학 카페의 책장 지기입니다. 온몸을 에이는 듯한 추위에 여러분은 어떻게 지내고 있으신가요? 저는 꽁꽁 언 몸을 녹이기 위해 따뜻한 헤이즐럿 라테 한 잔을 준비하고 여러분을 만나고 있습니다. 며칠 전 서점에서 책 몇 권과 시집을 샀습니다. 책을 소장해서 읽는 것을 좋아하는 저는 종종 서점에 가서 소설과 인문 분야 책을 삽니다. 그러나 시집은 정말 얼마 만에 샀는지 모르겠습니다. 교직 생활 초창기에는 책을 좋아하는 학생들에게 종종 시집을 선물했습니다. 시집 첫 장에 메모를 남겨 선물하면 학생들이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중 제가 좋아하는 커피나 피로회복제를 선물하면서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런 낭만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은 시대를 사는 저는 시집을 사서 읽을 마음의 여유조차 잃어버렸나 봅니다. 


꽃은 피는 대로 보고
사랑은 주신 대로 부르다가
세상에 가득한 물건조차
한 아름팍 안아보지 못해서
전신(全身)을 다 담아도
한 편에 이천 원 아니면 삼천 원
가치(價値)와 값이 다르건만
더 손을 내밀지 못하는 천직(天職)

늙어서까지 아껴서
어릿궂은 눈물의 사랑을 노래하는
젊음에서 늙음까지 장거리(長距離)의 고독(孤獨)
컬컬하면 술 한잔 더 마시고
터덜터덜 가는 사람

신이 안 나면 보는 척도 안 하다가
쌀알만 한 빛이라도 영원처럼 품고

나무와 같이 서면 나무가 되고
돌과 같이 서면 돌이 되고
흐르는 냇물에 흘러서
자국은 있는데
타는 놀에 가고 없다


  김광섭 시인의 ‘시인(時人)’입니다. 1969년에 발표한 이 시는 40년이 넘는 세월을 두고 시를 써 온 시인의 일생을 진지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화자가 생각하는 시인이란 존재는 ‘꽃’과 ‘사랑’으로 비유된 아름다움과 진실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보통 사람들은 부귀영화에 대해 온몸을 내던지지만, 시인은 오직 시 한 편을 위해 온몸을 불사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해서 탄생시킨 시 한 편의 고료는 겨우 이, 삼천 원에 불과할 뿐입니다. 시인에게도, 소설가에게도 먹고사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자신의 온몸을 불사르고 탄생시킨 작품이 세상의 잣대로 몇 푼 안 되는 돈밖에 안 되는 현실입니다. 수십 년을 창작 활동하신 유명한 시인들조차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하고, 생활비 앞에서 한없이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대면합니다. 앤드류 마슬로우는 ‘배고픔은 단지 먹을 음식의 부재가 아니라, 내면적인 충만함의 부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문학의 가치와 값이 다르건만 전신을 불살라도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시인이 느꼈을 허전함이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2011년 1월 담낭암과 싸워온 한국 문학의 큰 별이신 박완서 작가님이 세상과 이별하셨습니다. 당시 각계각층의 조문 행렬과 추모글이 이어졌지요. 그때 박완서 작가님의 유언이 회자되었습니다. 유족에 따르면 고인은 평소 "문인들은 돈이 없다"라며 "내가 죽거든 찾아오는 문인들을 잘 대접하고 절대로 부의금을 받지 말라"라고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문인들의 현실을 너무 잘 알고 있으셨던 작가님. 오랜만에 산 시집이 오늘은 더 죄송스럽게 느껴집니다. 가장인 화자가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욱 잘 드러난 박목월 시인의 ‘층층계’를 보겠습니다. 


적산 가옥 구석에 짤막한 층층계……
그 이 층에서
나는 밤이 깊도록 글을 쓴다
써도 써도 가랑잎처럼 쌓이는
공허감
이것은 내일이면
지폐가 된다
어느 것은 어린것의 공납금
어느 것은 가난한 시량대
어느 것은 늘 가벼운 나의 용전
밤 한 시, 혹은 
두 시. 용변을 하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아래층은 단칸방
온 가족은 잠이 깊다
서글픈 것의
저 무심한 평안함
아아 나는 다시
층층계를 밟고
이 층으로 올라간다
(사닥다리를 밟고 원고지 위에서
곡예사들은 지쳐 내려오는데……)

나는 날마다
생활의 막다른 골목 끝에 놓인
이 짤막한 층층계를 올라와서
샛까만 유리창에
수척한 얼굴을 만난다
그것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아버지>라는 것이다


나의 어린것들은
왜놈들이 남기고 간 다다미방에서
날무처럼 포름쪽쪽 얼어 있구나

 

  글을 써도 써도 가랑잎처럼 ‘공허함’으로 몰려와 화자는 스스로를 ‘생활의 막다른 골목 끝’의 ‘곡예사’와 같다고 느낍니다. 층층계를 밟고 이층에 올라가 시를 써야 하는 자신이 외줄 타기 하는 아슬아슬한 곡예사로 느껴졌던 박목월 시인. 자신의 전신(全身)인 시가 어린 자식의 공납금이 되고, 가난한 가정의 식량이 되어야 하는 무게 앞에 시인은 밤늦도록 잠을 청할 수 없습니다. 


  저는 명예퇴직을 소망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정년인 63세까지 교단에 설 자신이 없는데, 현실적인 문제로 이런저런 고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시인이 시 한 편을 창작하기 위해 전신을 불사르듯이 아이들 앞에서 목청껏 수업하는 것이 기력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이 저를 봐준다면, 저와 눈을 마주쳐준다면 저의 모든 기력을 다 끌어모아 기쁘게 수업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점점 쉽지 않습니다. 아직은 꾸역꾸역 아이들과 소통하면서, 눈을 맞추면서 수업하는데... 손뼉 칠 때 떠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96년 발령인 저는 65세부터 연금이 나온다고 합니다. 정말 먹고사는 문제가 걱정입니다. 칼릴 지브란은 ‘겨울의 심장에는 봄이 꿈틀거린다. 밤의 장막 뒤에는 미소 짓는 새벽이 있다.’라고 대의를 말했는데, 아직 등단도 하지 않은 풋내기 작가는 이렇게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합니다. 작가의 사명을 고민하기 앞서 이렇게 먹고사는 문제를 먼저 걱정하는 한없이 초라한 존재입니다. 김광섭 시인, 박목월 시인 등 수많은 시인 문인들은 이 험난한 길을 어떻게 견디셨을까요? 오늘 철학 카페의 책장 지기의 헤이즐럿 라테 선택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한없이 달달한 커피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오늘입니다. 오늘은 진한 아메리카노가 어울렸을까요? ‘가장의 무게’에 대해 말씀드리다 보니 힘든 목요일이 더 힘들게 느껴집니다. 힘든 목요일에 진한 아메리카노보다는 달달한 커피가 더 어울리겠습니다. 오늘은 커피도, 책장 지기의 마음도 이랬다 저랬다 합니다.      


  남은 여러분의 하루는 저처럼 갈팡질팡하지 마시고, 뜻하시는 바대로 꿋꿋하게 잘 걸어가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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