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시가 흐르는 철학 카페의 책장 지기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스며든다는 것입니다. ‘스며든다’는 말에 초점을 맞춰 오늘은 아인슈페너를 준비했습니다. 차가운 한입에 몸까지 차가워지실 수 있으니 따뜻한 곳에서 이 글을 읽으시길...
어느덧 12월이고, 어느덧 크리스마스가 열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크리스마스 계획이 있으신가요? 저는 이번 주 미리 명동을 다녀올 예정입니다. 크리스마스에 명동이라, 이미 눈치채신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 백화점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올해 ‘소망’을 주제로 편지를 주고받던 시절의 빈티지한 감성을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구현해 낸다고 합니다. 또한, 본점 외벽에는 3층 높이의 구조물을 설치해 유럽의 크리스마스 상점이 늘어선 거리처럼 꾸민다고 합니다. 이에 질세라 ○○○ 백화점은 연말 거리를 환상적인 뮤지컬 무대로 연출할 것이라고 합니다. 본점 외관 미디어 파사드로 펼쳐지는 3분여간의 영상은 극장의 붉은 커튼이 걷히고, 금빛 사슴을 따라 신비로운 숲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 캐럴과 함께 반짝이는 회전목마, 밤하늘을 달리는 선물 기차, 크리스마스트리로 둘러싸인 아이스링크가 차례로 펼쳐지며 마법 같은 판타지를 선사한답니다. 화려한 명동 거리를 거닐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들의 행복함을, 연인들의 설렘을 저도 함께 느낄 예정입니다.
저는 크리스마스 때 꼭 받고 싶은 선물이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큰 양말을 벽에 걸어 놓고,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종교도 무교이고, 굴뚝도 없는 셋방살이에 살았던 어린 저는 모 제과 업체에서 크리스마스 때면 여지없이 나오는 빨간 플라스틱 장화 과자 선물 세트를 너무나 받고 싶었습니다. 먹고사는 게 힘드셨던 부모님은 어린 삼 남매의 크리스마스 소망까지 신경 쓰실 여력이 없으셨을 겁니다. 걸어 놓은 양말에는 항상 과자 한 개가 달랑 들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에게 크리스마스 아침은 실망의 연속이었습니다. 점차 나이를 먹고, 산타할아버지를 믿지 않게 되면서 다짐했습니다. 내가 어른이 돼서 돈을 벌면 저 플라스틱 장화 과자 선물 세트를 마음껏 사겠다고. 받고 싶은 선물을 받지 못한 어린 마음에 상처가 났나 봅니다. 그때는 저 과자 선물 세트 하나 안 사주시는 부모님을 원망했던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부모가 되어 그 시절의 부모님을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아려옵니다. 철없는 자식의 어리광을 외면해야만 했던 그 마음을 온전히 제가 짐작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1인당 GDP가 3만 3천 달러를 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제가 천 7백 달러를 겨우 넘긴 시대를 살아낸 부모님 세대의 아픔을 이해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로 시작된 저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안도현 시인의 ‘스며든다는 것’에 머물렀습니다.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간장 게장을 단순히 밥도둑으로만 보는 제 입장에서는 안도현 시인의 빛나는 관찰력이, 기가 막힌 표현력이 한없이 부럽습니다. 앞으로 간장 게장을 먹을 때마다 이 시가 떠올라 먹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시인의 작품이 그 어느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보다도 빛납니다. ‘장화 과자 선물 세트’ 사 달라고 조르는 저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마음이 이와 조금이라도 비슷했을까 걱정입니다.
커피가 아이스크림 위에 뿌려지면서 아이스크림도 커피도 하나가 됩니다. 커피가 스며든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먹습니다. 달콤함이 입 안 가득 머뭅니다. ‘스며든다’는 것은 이렇게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시에서 스며드는 행위는 어미가 아이를 달래면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슬픈 행위일 것입니다. 안도현 시인의 시에서 스며든다는 것은 슬픔입니다. 그러나 스며들 수 없기에, 스며듦을 거부했기에 그 끝이 슬플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을 낭송해 보겠습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
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윤동주’라는 이름 석 자조차 허용되지 않은 시대. 수많은 존재의 본래 이름을 마음껏 부를 수 있는 시대를 열망했던 시인. 그러나 자신의 ‘윤동주’라는 이름을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릴 수밖에 없는 시인.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라는 마지막 시인의 말이 아픕니다. 스며들 수 없는 시대를 살아내야 했기에 부끄러웠고, 스며들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부끄러워했던, 그로 인해 26년 7개월로 삶을 마감한 윤동주 시인. 일제 강점기에 ‘스며듦’을 거부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분께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합니다.
그대들로 인해 저희가 이렇게 독립된 조국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