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시가 흐르는 철학 카페의 책장 지기입니다. 오늘은 커피가 아닌 딸기 스무디를 준비했습니다. 이 추위에 책장 지기의 음료 선택에 의아하실 겁니다. 저는 요즘 몸도 마음도 지침을 느낍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마음의 지침으로 몸도 한없이 지쳐가고 있습니다. 윌리엄 제임스가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전 요즘 마음도, 얼굴도 고장이 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아주 차가운 음료로 마음을 얼려 버리고 싶어서 스무디를 선택했습니다. 이 차가움이 마음을 얼려 버리고, 복잡한 생각도 얼려 버리기를 바라면서 시원하게 한 모금 깊게 마셔봅니다.
처음 연재 브런치를 계획할 때 이번 목차는 ‘나아감’으로 구성했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나아갈 수 없어서 목차를 급하게 변경했습니다. 아무리 자료를 찾고, 생각을 쥐어짜도 '나아감'으로 단 한 줄의 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머릿속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생각에 점령당해 일주일 넘게 펜을 쥘 수 없었습니다. 억지로 글을 짜내기를 잠시 멈추고,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을 펼쳤습니다.
모랫벌에 박혀 있는
하얀 조가비처럼
내 마음속에 박혀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슬픔 하나
하도 오래되어 정든 슬픔 하나는
눈물로도 달랠 길 없고
그대의 따뜻한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이의 슬픔 속으로
깊이 들어올 수 없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지금은 그저
혼자만의 슬픔 속에 머무는 것이
참된 위로이며 기도입니다
슬픔은 오직
슬픔을 통해서만 치유된다는 말씀을
언제부터 지니게 되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항상 답답하시겠지만
오늘은 멀찍이서 지켜보며
좀 더 기다려주십시오
이유 없이 거리를 두고
그대를 비켜가는 듯한 나를
끝까지 용서해 달라는
이 터무니없음을 용서하십시오
-이해인, 슬픈 날의 편지
생각을 비우기 위해 펼친 이해인 수녀님의 ‘내 마음속에 박혀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슬픔 하나 하도 오래되어 정든 슬픔 하나’라는 문구에서 책장 지기는 고장 난 마음의 근원을 어렴풋이 보는 듯했습니다.
23살에 처음 교단에 선 저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 시련으로 오랜 시간 동안 트라우마도 생겼지요. 그러나 저는 그 시련과 슬픔의 실체를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없어서 외면하고 회피하기 급급했습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일들이 저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는 것을 인지했습니다.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나 싶으실 겁니다. 20대 어린 나이에 당한 그 일이 지금 이 나이에도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처음 교단에 섰을 때 수업 잘하는 교사, 학생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교사를 다짐하면서 의욕을 불태웠습니다. 방학 때 노량진 학원에 가서 흡입력 있게 강의를 잘하는 강사를 수소문해 한동안 수강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23살의 저는 열정으로 빛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상담을 핑계로 걸려 온 전화 한 통. 목소리로 그 아이가 누구인지 짐작이 갔습니다. 수화기 너머 아이는 상담을 핑계로 저를 성희롱했습니다. 혈기 왕성한 고등학교 남학생의 성 문제를 상담하는 아이 옆에 낄낄대는 다른 남학생들의 목소리도 고스란히 저에게 전해졌습니다. 성에 대해 질문하는 아이에게 저는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당황한 저의 모습은 수화기 너머에 있는 아이들에게로 그대로 전해 졌겠지요. 저는 그 시간을 견딜 수 없어 서둘러 전화를 끊었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에게 말하기도 창피해서 말도 못 하고 혼자 가슴앓이를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계속 수업 시간에 그 아이들을 봐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들이 저를 수군거리고, 낄낄거리며 바라보는 그 눈빛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혼자 가슴앓이하던 저는 주변 선생님에게 힘듦을 얘기했고, 그 선생님들이 관리자에게 해결책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해결책은 없었습니다. 관리자들의 ‘라떼는’으로 시작하는 장황한 말의 요지는 결국 교사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이라면 결과가 달라졌을까요? 20년도 전에 일어난 그 일은 결국 당연히 저 혼자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한 해 동안 그 아이들의 빈정대고 희롱하는 눈빛을 애써 외면하면서 혼자 감내했습니다. 그때 무책임했던 관리자들, 한없이 무기력하고 나약했던 교사인 저의 모습은 지금도 가끔 투영되어 이렇게 스스로를 고장 나게 만듭니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책임지지 않고 가식적인 관리자의 모습을 정면으로 대면하면 아직도 그때가 겹칩니다. 그날의 잔상이 투영되면서 이렇게 몸과 마음이 고장 나 버립니다.
잿빛 구름 잔뜩 뿌려놓고
하늘이 어디 갔어요
가끔은 하늘도
쉬는 날이 필요해
-정유경, 흐린 날
하늘도 쉬어가기도 하는데 우리도 쉬어가도, 멈추어도 괜찮겠지요. 이 멈춤은 딸기 스무디의 차가움으로 고장 난 마음을 인위적으로 얼리는 것이 아니라 생채기 난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는 위로가 될 테니까요.
힘들면 멈출 줄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으면 해. 19살의 나는 늘 주변에 가족과 친구들이
있어서 기쁠 땐 크게 소리 내어 웃고, 슬프고 힘들 땐 울고 투정 부리는 아이지만 30살을 바라보는 너는 쉽게 그러진 않을 것 같아. 하지만 19살 때의 네가 지금의 너를 이렇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힘들 때 멈춰가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어른이었으면 좋겠어
10년 후 나에게 쓰는 미래 편지 쓰기에서 한 아이가 작성한 이 글이 오늘은 유독 마음에 와닿습니다. 철학 카페의 책장 지기인 저는 ‘멈출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부귀영화를 바라지도, 탐하지도 않은 삶을 살아온 저는 멈추면 안 되는 줄 알았습니다. 남들보다 먼저 가기를 원하지도 않았지만, 남들과 비슷한 속도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정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멈춤’이 뒤처짐이라고 생각하고 인생에서 한 번이라도 멈추면 큰일 나는 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멈춤’을 연습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쉼이 필요할 때 잘 멈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멈춤이 필요하실 때 잠시 쉬어가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겠습니다.
최대의 어둠은 일몰 직전에 오며, 그 이후로는 햇빛이 밝아진다.
-파스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