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시가 흐르는 철학 카페의 책장 지기입니다. 2024년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아직은 새해를 맞이하는 기쁨보다 또 한 해가 지나감에 대한 아쉬움이 가득합니다. 이는 나이 때문이겠지요. 언제까지 청춘인 줄 알았는데 어느덧 50을 넘었습니다. 100세 시대에 50은 청춘이라고 바득바득 우기고 싶지만, 그 바득 거림이 나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겨울에 비친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이상 시인의 '거울'이 떠오릅니다.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 – 악수를몰는왼손잡이오
거울대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욱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事業)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反對)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이상 작가는 거울을 모티프로 일상적 자아(현상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본질적 자아) 사이의 갈등을 치열하게 고민했는데, 책장 지기는 거울에 비친 주름과 피부 처짐을 걱정합니다. 책장 지기라고 말하기도 부끄럽게 속물적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런 속물적인 마음에 깃든 '젊음에 대한 그리움'을 얘기하고자 합니다. ‘젊음에 대한 그리움’으로 책장을 펼치기 전에 고소한 맛이 감도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준비하겠습니다. 아메리카노 커피보다 달콤한 커피를 선호하는 책장 지기 입맛에는 고소한 맛에 앞서 쓰디쓴 맛이 먼저 느껴집니다. 쓴맛과 고소한 맛이 혼재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면서 책장을 펼치겠습니다.
세상은 젊음의 무대
젊음은 좋은 것이다
새롭고 좋은 것들은 다
젊음의 것이다
젊음이 없는 나라는
아무리 부귀해도 앞날은 내리막이고
젊음이 없는 성소는
아무리 거룩해도 비탄의 성가가 흐르고
젊음이 없는 도서관은
아무리 높아도 소멸의 기운이 감돌고
젊음이 없는 조직은
아무리 잘해도 석양의 종소리가 울리니
젊음은 언제나
그 자체로 승리자인 것
젊음으로 너는 잠깐
세상을 다 가졌다
아 그러나 젊은이는 정작
젊음이 얼마나 귀한 줄 모른다
자신의 밭에 보물이 묻힌 줄도 모르고
헐값에 팔아넘기려는 자처럼
젊은 날의 고결한 이상과
젊은 날의 탐험의 열정과
젊은 날의 투쟁과 상처가
얼마나 위대한 걸 심어가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오늘의 젊음은
젊은 육체에서 추방당해
밤이 오면 그의 꿈길을 헤매며
그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으니
남김없이 사르지 않은 젊음은
늙고 병든 육신에 지고 가야 할
집착과 회한의 무거움이니,
젊음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생애 내내 젊음은 갈망하느니
그러니 젊음이여,
짧아서 찬란한 그대의 날들에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라
웅크린 어깨를 펴고 곧게 걸어라
무기력하기보다는 무모해져라
불평만 하기보다 불온해져라
비틀거리며 넘어져도 다시
젖은 눈으로 달려가라
힘은 네게 있고
빛은 네게 있고
너는 지금 젊음 그 자체로
이미 승리자이니
-박노해, '젊음은 좋은 것이다'
박노해 시인의 말처럼 젊을 때는 몰랐습니다. 그 젊음이 얼마나 소중하고, 빛나는 것인지 정말 몰랐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그대가 의미를 가지고 사는 한 그대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20대에는 의미를 가지고 사는 것 자체가 버거웠습니다.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살아야 할지 고민스러웠습니다. 젊은 날의 고결한 이상과 탐험의 열정과 투쟁과 상처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힘이 있고, 빛이 나는 과 선배를 동경했나 봅니다. 무기력하기보다, 불평하기보다 찬란한 날들에 고개 들고 당당히 앞으로 걸어가는 그 선배가 참 멋져 보였습니다.
선배는 저보다 몇 학번 위입니다. 그러나 선배는 휴학을 반복하면서 저희 학번과 전공 수업을 같이 들었습니다. 선배는 가정 형편으로 본인의 힘으로 온전히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방학 때마다 공사장에서 힘든 일을 했고요. 몸은 고돼도 한 달 일하면 다음 학기 돈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말하는 선배의 환한 얼굴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본인의 고된 환경에 불평하지도, 무기력하지도 않았지요. 오히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목청껏 소리 높였습니다. 선배는 과 대표, 단과대 대표, 전체 학생회 부회장을 하면서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저는 빛나는 선배를 보면서 저런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생각이 행동을 막아버리는 소심한 젊음이었지만, 그래도 선배를 닮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빛나기만 하던 선배. 그 누구도 선배의 빛나는 앞날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신은 우리에게 감당할 만큼의 시련을 준다’라고 하지요? 저는 선배의 사고 소식을 듣고, 이 말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고로 선배는 하반신을 잃었습니다. 그때 선배의 나이 27살. 병원에서 본 선배의 빛을 잃은 눈동자. 서로의 눈이 마주쳐도 선배는 우리를 보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선배는 우리에게 빛나는 동경의 대상이었지만 누구도 마음 편히 얘기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선배가 교사의 꿈 대신 다른 꿈을 꾸고 있다고, 그 꿈을 실현했다고....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아파하면서 선배를 떠올리지 않습니다. 마음 편하게까지는 아니어도 이제는 선배를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한양대 운동장에서 학교 깃발을 힘차게 흔들던 선배의 빛나는 모습을 가슴에 담으면서 앞으로 더욱 빛날 선배의 미래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책장을 덮겠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지도, 성내지도 말라.
슬픈 날에는 참고 견디라,
기쁜 날이 반드시 찾아오리니.
— A. 푸시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