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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랏말싸미 Dec 28. 2023

여덟 번째 장은 그리움 한 스푼입니다.

  안녕하세요? 시가 흐르는 철학 카페의 책장 지기입니다. 어느덧 한 해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올 한 해를 마무리하시는 심정이 어떠한가요? 저는 내년 희망에 대한 설렘보다 올 한 해에 대한 아쉬움이 큰 것 같습니다. 이 아쉬움은 2023년에 대한 미련일까요? 반백 년을 살아온 삶에서 겹겹이 쌓인 그리움일까요? ‘누구나 가슴에 그리움 하나씩 품고 산다’라는 말이 있지요? 그래서 오늘은 달콤한 바닐라 라테 한 잔을 준비해서 여러분을 만나고 있습니다. 어떤 대상을 좋아하거나 곁에 두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어서 애타는 마음인 ‘그리움’. 책장 지기인 저는 그리움 단어 끝에 이용악 시인을 떠올렸습니다.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白茂線) 철길 우에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이용악, 그리움


  이 시는 해방 직후 혼자 상경하여 서울에서 외롭게 생활하던 시인이 무산(茂山)의 처가에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지었다고 합니다. 가족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그리움이 잉크병도 얼어붙은 차가움과 대비되는 듯합니다. 그러나 험한 벼랑을 돌아 밤새워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쌓이는 복된 함박눈에는 시인의 그리움이 담겨 따뜻함이 느껴지는 것도 같습니다. 이렇듯 그리움에는 차가움과 따뜻함이 공존합니다. 이 차가움은 뒤늦은 후회일 것이고, 따뜻함은 행복했던 추억 때문이겠지요.


  타임머신이 있어 과거로 돌아간다면 여러분은 어느 시절로 돌아가고 싶으신가요? 저는 대학교 1, 2학년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대학교 4학년은 취업에 대한 부담감으로, 교직을 시작했던 풋풋한 시절은 지난번 말씀드린 사건으로 죽어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고등학생 때는 두말하면 입만 아플 정도로 당연히 거부할 것입니다. 헛된 망상일지라도 이리 생각해 보니 그래도 저는 현재 삶이 지난 삶보다 만족스러운 것 같습니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사물은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그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서만 존재한다’라고 했는데, 현재의 만족감은 책장 지기의 생각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후회와 아쉬움이 만들어낸 그리움의 순간은 대학교 1, 2학년 때입니다. 대학교 신입생으로 경험했던 많은 소중한 추억과 그리운 사람들. 그때는 그 사람들의 소중함을 몰랐습니다. 신입생을 잘 챙겨주었던 선배들의 따뜻한 보살핌을 당연하게 여겨 함부로 했습니다. 그들의 따뜻함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그들의 빈자리를 느끼고서야 비로소 깨달은 어리석은 존재였습니다. 타임머신으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섣부른 사랑으로 사람을 잃기보다 끈끈한 우정으로 오래 볼 수 있는 길을 택할 것입니다. 이 또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겠지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지 않더라도 꼭 한 번은 사과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꼭 사과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너무 유명한 원태연 시인의 시구이지요? 이 글로 그 사람과의 사랑이 시작되었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 열렬히 사랑했고, 대학교 4학년 때 군대에 간 그 사람을, 군대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 사람을 제가 떠났습니다. 그러고도 그 사람에게 제대로 변명도, 사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제대하고, 그 사람을 마지막으로 본 날 군대에서 부치지 못한 수많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DJ님께서도 군대를 다녀오셨는지요? 저는 〇〇〇경찰서에서 18개월째 군 복무를 하고 있습니다. 아침 점오가 굿모닝 팝스를 시작하는 여섯 시라 처음부터 다 듣지는 못해도 늦게라도 꼭 라디오를 켭니다. 오늘 하루의 희망을 바라면서 말입니다. 지난 주일엔 저를 군대에 보내고 떠나간 소녀의 생일이었습니다. 한 가지를 잃고도 모든 것을 잃은 그런 느낌의 소녀말입니다. DJ님께서도 그런 경험이 있으신지요? 이런 말은 영어로 어떻게 하나요? 오늘 아침엔 라디오로나마 들려주고 싶습니다.
  ‘네가 나를 떠나도, 나는 네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의 글에는 원망이 없었습니다. 원망은커녕 저의 행복을 빌고 있었습니다. 그 글을 보고서야 어리석은 저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 사람의 아픔과 저의 예의 없었던 이별을 말이지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형기, 낙화-


  저는 뒷모습이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의 편지로 저의 적나라한 실체를 접하고도 저는 그 사람에게 변명도, 사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저의 어떠한 말도 변명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차마 못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도 용기를 내서 변명도 하고, 사과도 하는 것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최소한 그 사람에 대한 예의였겠지요. 그럼에도 저는 창피함에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것으로 저의 잘못을 회피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저는 비겁하고 그 사람에 대해서도, 우리의 사랑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머리가 복잡하거나 책향기가 그리울 때 책장 지기인 저는 서점에 갑니다. 평온함이 그리울 땐 동네 조그만 서점에 가서 커피와 더불어 글 내음을 맡고, 책향기가 그리울 땐 큰 서점에 가서 책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큰 서점에 가면 여지없이 그 사람의 시집을 접하게 됩니다. 그 사람은 오래전에 신춘문예 당선하여 시인으로,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 그 사람 시집을 발견하고 당황한 마음에 그 시집을 펼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사람의 시집을 읽으면서 무거운 저의 마음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글에는 제가 알던 모습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어렸던 우리의 사랑을, 예의 없었던 이별을 승화한 그 사람의 시에는 아름다운 사람의 향이 묻어났습니다. 저에게 지난 추억이 그리움이듯 그 사람에게도 지난 추억이 그리움일지 궁금해집니다. 어느 날, 그 사람에게 사과할 수 있다면 이 겨울이 조금은 더 따뜻하게 느껴지겠지요.


  여러분이 오늘 되새길 추억이 한겨울의 추위를 녹일 따스함이시길 바라면서 책장을 덮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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