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한마디: 때론 추억의 음식이 그 시절로 우리를 이끈다.
일산으로 이사 와서도 방학 때마다 잊지 않고 꼭 방문하는 곳이 있다. 37킬로미터의 거리를, 왕복 3시간에 걸쳐 운전하고 가서 1시간도 안 걸려 뚝딱 음식을 먹어 치우는 그곳. 신당동 즉석떡볶이. 왜 굳이 그 장소에 가서 그 음식을 먹을까?
이번에도 영하 10도 이하의 최강 한파를 자랑하는 날 신당동에 갔다. 평일 낮이기에 차가 막히지 않을 거라 믿고 천천히 출발했는데, 우리의 강변북로는 평일 한낮에도 변함없이 막혔다.
“이러다 사람이 가장 많을 때 도착하겠어요. 설마 대기해야 하는 거 아니겠죠?”
“오늘 최강 한파여서 사람들 별로 없을 거야.”
“핫플은 그런 것을 가리지 않아요. 언제나 붐비거든요. 전 사람이 엄청 많을 것 같아요.”
나의 확신에 조카는 반기를 들었다. 평일 한낮에, 이런 최강 한파에 아무리 유명한 곳이라도 방문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우리도 이렇게 가고 있으면서 뭔 이런 확신을 했는지... 12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와~ 가게 안이 사람들로 꽉 찼다. 다행히 맨 끝 두 자리가 비어있어서 기다리지 않고 바로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추운 날에도 이렇게 사람이 많다니...”
“제가 말했죠? 핫플은 항상 사람이 많다고요.”
신당동 떡볶이 역사
오늘날 가장 대중적인 고추장 기반의 소스를 넣고 매콤하게 볶는 떡볶이는 해방 이후 전란 등을 거치며 탄생하였다. 1953년 신당동에서 신당동 떡볶이로 유명한 마복림 할머니가 고추장 떡볶이를 고안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고추장 떡볶이는 북한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남한에서만 대중적이다. 북한에도 간장 떡볶이와 같은 요리가 있긴 하지만, 이 역시 그리 대중적인 음식은 아니다.
신당동의 마복림 할머니는 고추장 떡볶이를 개발하면서 라면 사리와 즉석떡볶이 조리법을 널리 알려 전국의 분식집 밥줄을 창출하였다. 한때 공전의 히트를 친 "며느리도 몰라" 광고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당시 인터뷰에 의하면 중국집에서 중국식 양념이 베인 떡 요리를 대접받게 되었고, 이 음식이 맛은 좋은데 좀 느끼해서 칼칼한 양념이 더해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고추장으로 볶은 떡을 생각해냈다고 한다. 그녀는 1953년 신당동에서 노점상으로 떡볶이 장사를 시작했으며, 처음에는 연탄불 위에 양은 냄비를 올려놓고, 떡과 야채, 고추장, 춘장 등을 버무려 팔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점점 이를 볶아서 만드는 고추장 떡볶이로 바뀌었는데, 어느 날 한 여학생이 라면을 사 들고 와서 같이 끓여달라고 요청한 것이 시초가 되어 라면 등의 각종 사리류도 팔기 시작하였다. -나무위키 인용-
배가 사정없이 고픈 우리는 라면, 쫄면, 계란을 추가했다. 즉석떡볶이가 보글보글 맛있게 끓었다. 보글보글 끓을 때 만두를 넣었다.
만두는 그대로 두고 라면 사리와 떡볶이, 어묵을 개인 접시에 푸짐하게 덜어 크게 한입에 넣었다. 입안 가득 뜨거움이 느껴졌지만, 뜨거움을 맛있음이 이겼다. 연신 호호 불면서 한입 가득 넣었다. 만두가 흐트러지기 전에 만두를 먹었다. 만두에 양념이 흠뻑 묻어 따뜻함이 느껴졌지만, 아직 바삭함이 남아 있어 맛있었다. 이번엔 계란이다. 계란을 잘게 부숴 양념에 묻혀 숟가락으로 퍼 먹었다. 너무 맛있다. 마지막은 뭔지 아실 것이다. 배는 이미 꽉 찼는데도 볶음밥은 왜 또 그리 맛있는 것일까? 다들 배가 부르다는 말을 하면서도 눌어붙은 밥까지 싹싹 긁어서 다 먹어 치웠다. 신당동 즉석떡볶이는 20년 전, 30년 전에 먹었던 그 맛 그대로였다. “며느리도 몰라. 아무도 몰라”의 문구가 “이젠 며느리도 알아요.”가 추가된 간판으로 바뀌었지만, 손맛은 그 문구 그대로 전해졌나 보다. 예전과 변함없는 그 맛이 나를 과거 그때로 이끈다.
풋풋했던 20대, 나는 캠퍼스 커플이었다. 과 후배와 사귀었던 나는 당당하게 캠퍼스 커플임을 공개하지 못했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싫었을까? 아니면 후배와 사귀는 것이 스스로를 위축되게 했을까? 그 심리가 뭔지도 모르면서 비밀로 했다. 그러면서 캠퍼스 커플이 하는 것은 또 하고 싶었나 보다. 나란히 앉아서 강의를 꽁냥꽁냥 듣고 싶었다. 그래서 야간 강의를 선택했다. 학교 식당에서 저녁을 먹지 못하고, 학교 근처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그때 자주 갔던 곳이 남산과 신당동이었다. 용돈이 넉넉하지 않은 가난한 대학생들에게 신당동 떡볶이만 한 것이 없었다. 사범대학이 있는 후문이 아닌 중문에서 굳이 만나 신당동으로 걸어갔던 그때. 아직 서로의 손을 잡지 않은 상태에서 나란히 걸었던 우리는 서로의 손끝이 스치기만 해도 설렜다. 그래서였을까? 30분의 거리가 너무 짧게 느껴졌다. 그 친구와 처음 방문했던 신당동 떡볶이. 온갖 내숭을 떨면서 조심스럽게 먹던 그 설렘 속에서도 신당동 떡볶이는 맛있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그 길을 다시 걸어본 적이 없는데도 그 길은 여전히 기억 저편에 살아 있다. 풋풋했던 20대의 예쁜 기억으로. 그 시절 신당동 떡볶이는 설레는 맛이다.
30대의 신당동은 사랑과 미안함의 맛이다. 아들을 임신하고 남들은 입덧으로 고생한다고 하지만 다행히 나는 입덧이 없었다. 입덧하지 않았지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기억하는 예전의 맛이 아니었다. 그래서 별로 입맛이 없었다. 남편은 그런 나를 위해 평소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주거나 포장해 왔다. 그런 남편을 위해 맛있게 많이 먹고 싶었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잘 먹지 못했다.
“네가 떡볶이 좋아하니까 우리 신당동 갈까?”
“응? 신당동? 입맛이 확 당기기는 하네.”
“그래? 그럼 가야지.”
남편이 신당동 떡볶이를 얘기하자 구미가 확 당겼다. 10여 년 만에 방문하는 그곳은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남편과 뱃속 아이까지 세 명이 처음 방문한 신당동 떡볶이는 여전히 맛있었다. 임신하면서 예전 세상 모든 맛을 잃었는데 그곳은 예전 그대로 그 맛을 느끼게 해 주었다. 맛있게 먹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남편은 뿌듯하게 웃으면서 연신 내 접시를 채워줬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남편은 신당동 즉석떡볶이 먹기가 고역이었을 것 같다. 그때 구내염이 좀처럼 낫지 않아 고생했기 때문이다. 병원에 가서 치료해야 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기 전이었지만, 뜨겁고 매콤한 맛에 얼마나 아팠을지... 미안하다. 그렇게 30대 신당동 떡볶이는 사랑과 동시에 미안함이 깊게 벤 맛이다.
살면서 참으로 기쁨을 주는 것이 몇 가지나 될까 헤아려보니 그 첫 번째는 단연코 음식이다.
-Lin Yut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