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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랏말싸미 Apr 22. 2024

천안 독립기념관 찍고, 석갈비 찍고, 호두과자를 찍다Ⅰ

오늘의 한마디: 소중한 우리 역사....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와 찬란한 성함들....


  “엄마, 천안 독립기념관 갈 수 있는 시간 있으세요?”

  “제대 전까지 남은 휴가 모두 소진하기 어렵다며. 그래서 지난 휴가 때 안 갔잖아. 그런데 왜?”

    “다녀오면 좋을 것 같아서요. 몇 년 전 태안 갔다 들렸는데 폐장 시간이어서 관람 못 했잖아요. 그때 관람 못 한 것도 아쉽고, 다녀오면 휴가도 받고요.”

  “지금 남아 있는 휴가도 다 못 쓰는데?”

  “겸사겸사 갔다 오면 좋잖아요. 엄마 바빠요?”

  “아니야. 괜찮아. 할머니도 좋아하실 테니 모시고 함께 가자.” 

  “엄마, 학기 중인데 괜찮아요?”

  “1년 만에 너랑 가는 여행인데 너무 좋지. 독립기념관 근처 석갈비 유명한 집 있더라. 거기도 가자.”


  아들 휴가에 맞춰 천안 독립기념관을 계획했다. 토요일 당일로 다녀올 계획이니 이른 시간에 출발할 계획을 짰다. 아들 없이 간 무안 여행이 즐거우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는데.... 그 허전함을 이번 천안 여행으로 달랠 수 있을 것 같다.  


  교통 체증을 염려해 6시에 출발했다. 내비게이션 소요 시간이 2시간이 조금 넘게 떴다. 역시 주말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내비게이션이 강변북로로 우리를 안내했다. 시도 때도 없이 막히던 강변북로가 웬일로 하나도 안 막혔다. 경부고속도로 진입할 때만 살짝 막히고 만남의 광장까지 속도가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그러니 욕심이 났다. 


  “엄마, 다음 휴게소에서 아침 식사하려고 하는데 괜찮으세요?”

  “그럼. 괜찮지.”

  “저도 괜찮아요.”


  만남의 광장은 그대로 통과다. 그러나 이 선택은 잘못이었다. 몇 킬로미터를 가지도 못하고, 바로 교통 체증이 시작되었다. 내비게이션이 새로운 경로로 우리를 안내했다. 경부고속도로와 용인서울고속도로 분기점인 금토 JC로 안내한 것이다. 길치인 주제에 순간 망설였다. 만남의 광장 다음인 기흥휴게소에서 아침 식사를 하려 했기에 낯선 길로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을 배신할까 고민했다. 그러나 소심한 나는 배신할 배짱도 없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금토 JC, 서수지 나들목으로 갔다. 길이 말도 못 하게 막혔다. 경부고속도로가 더 막히니 똑똑한 내비게이션이 우리를 이 길로 안내했을 것이다. 그렇게 수도 없이 위안 삼았지만, 배고픔에 스멀스멀 올라오는 후회를 막을 수는 없었다. 7시에 먹을 아침을 8시가 넘어서도 먹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20킬로미터 안팎의 속도로 고속도로에 겨우 진입하여 9시에 드디어 안성휴게소에서 아침을 먹었다. 목천 나들목까지 여전히 막혔지만, 배고픔을 해결한 우리는 여유가 생겼다. 


  드디어 천안 독립기념관에 도착했다. 드넓은 공간에 우뚝 솟은 겨레의 탑이 우리를 반기는 듯했다. 태극 열차를 탈까 잠시 고민했지만, 몇 시간 동안 고생한 엉덩이를 쉬게 하고자 산책로를 선택했다. 태극 마당과 광개토대왕릉비를 지나 독립기념관 본관(겨레의 집)에 도착했다. 내부 중앙에 웅장하게 자리 잡은 불굴의 한국인 상 조형물에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감탄사를 연발하며 불굴의 한국인 상을 보던 우리는 오른쪽 벽면에 크게 자리 잡은 태극기를 보았다. 한국광복군 서명 태극기. ‘굿세게 싸우자’, ‘피 흘릴없는 독립은 값없는 독립이란 것을 자각하자’, ‘우리에게 독립은 단결이다’... 태극기에 서명된 수많은 글귀와 이름들. 감사함과 죄송함, 먹먹함이 온 마음에 가득했다. 

  처음은 ‘겨레의 뿌리’이다. 고인돌로 시작하여 가야와 고구려의 기마무사상, 가야의 제철 공방, 팔만대장경, 신이 내린 기술 백제금동대향로, 조선의 훈민정음해례본, 임진왜란과 거북선 등 수많은 전시물이 있었다. 

  3시간 넘게 걸린 길이 아깝지 않았다. 한국인이라는 자부심과 우리 역사의 소중함으로 마음이 충만해졌다. 가족들과 즐거운 마음으로 종알종알 얘기하면서 2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2관은 ‘겨레의 시련’이다. 아,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인가 보다. 미스터 선샤인에 자주 등장했던 전차가 실물 사이즈로 전시되어 있었다. 유진 초이가 된 것처럼, 고애신이 된 것처럼 전차에 앉았다. 전차에 앉으니 드라마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설레는 감정은 여기까지. 을사늑약을 맺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의 모형물을 보니 욕이 나올 뻔했다. 이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도 아깝다. 을사늑약 후 일본의 만행은 극에 달했다. 정말 전시관 이름처럼 우리 국민의 시련이 펼쳐졌다. 독립운동 혐의로 끌려가 고문당하고, 강제 징용에 끌려가고, 위안부로 끌려가는 수많은 시련이 눈앞에 펼쳐졌다. 모형물이었지만, 그 시대의 아픔이 느껴져 가슴이 아팠다. 

  우리는 분노와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제3관 ‘겨레의 함성’으로 이동했다. 3・1 만세 운동으로 수많은 사람이 고초를 겪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3・1 운동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미국, 러시아 등 국외로 퍼진 사실은 몰랐다. 겨레의 함성.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라는 민족대표 손병희 선생의 말은 이 시대 모든 사람의 마음이었나 보다. 7,509, 15,961, 46,948.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제의 탄압으로 인한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체포 및 투옥자 46,948명을 의미한다. 일제의 탄압에도 빼앗긴 우리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한 겨레의 함성이 들리는 듯했다.

  제4관은 ‘평화누리’였으나 수리로 인해 관람할 수 없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5관 ‘나라 되찾기’로 향했다. 독립군의 피 묻은 태극기를 시작으로 봉오동 전투, 청산리대첩을 보니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먹먹한 울림이 느껴졌다. 안중근 의사, 김상옥 의사, 이봉창 의사, 백범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 윤봉길 의사의 사형틀을 보니 가슴으로만 느껴졌던 먹먹함이 눈가의 이슬로 맺혔다. 눈가를 훔치면서 발걸음을 옮기니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나왔다. 이런 각박한 현실에도 헌법을 만들고, 국무원을 조직하고, 외교, 교육, 문화, 군사, 의열투쟁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토요일 아침 천안 독립기념관까지 오는 길이 험난하기 그지없었지만, 더한 어려움이 있었어도 꼭 와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의 휴가를 위해 떠난 길이 몸과 마음을 충전시켜 주는 자양분이 되었다. 수많은 사람의 희생으로 지켜낸 이 땅. 자랑스럽고 소중한 우리의 대한민국. 이 모든 감정을 가슴 한가득 담고 우리는 석갈비 식당으로 향했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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