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랏말싸미 Apr 08. 2024

기분 전환에 그만인
매콤 명태 문어조림

오늘의 한마디: 인생에서 때론 매콤한 맛이 정신을 차리게 한다. 

  28년을 쉼 없이 달려온 것은 잘한 일일까? 아니다. 쉼 없는 달리기는 지칠 뿐이다. 때로는 걸어가야 하고, 때로는 쉬어야 한다. 지금은 걸어야 할 시기인가? 쉬어야 할 시기인가? 언젠가부터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이다. 계속 파 오던 우물이 아닌 다른 우물에 자꾸 시선이 간다. 


  이때 눈을 사로잡는 공문이 있었다. ‘경기 교사 연구년 추진계획.’ 설렜다. 신청한다고 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벌써 된 것처럼 마음이 부풀었다. 공문을 형광펜으로 밑줄 그으면서 꼼꼼하게 확인했다. 교육 기여, 전문성 향상, 정책 기여는 정량평가로 이루어졌고, 연구년 계획서는 정성평가로 이루어졌다. 정성평가로 이루어진 연구년 계획서는 무려 14쪽이나 작성해야 했다. 이 많은 것을 어떻게 작성해야 하나 막막했다. 연구년 계획서의 평가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교사 소명 의식 및 교육철학, 연구년 신청 배경 및 자기 성장 의지, 연구년 계획의 체계성, 구체성, 타당성, 연구년 후 현장 기여를 계획서에 담아내야 했다. 


  28년의 세월을 되돌아봤다. 28년의 세월이 부질없지는 않았다. 가슴 아팠던 아이들, 보람을 느끼게 해 줬던 아이들, 소식이 궁금한 아이들, 꼭 보고 싶은 아이들, 28년의 세월에는 온통 아이들이 있었다. 이 아이들 덕분에 소명 의식이, 교육철학이 희박했던 내가 이렇게나마 성장한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14쪽 분량의 연구년 계획서를 후딱 썼다. 일주일 동안 연구년 계획서를 검토하고, 관련 서류를 준비했다. 모든 준비를 마무리하고, 담당 부서에 관련 서류를 넘겼다. 모든 과정을 마무리한 나의 심정은 뿌듯했다. 무엇이 그리 뿌듯했을까? 28년 동안 한 우물만 파온 것이 헛되게 느껴지지 않아서였나. 조금은 기특하기도 했다. 이렇게 열심히 잘 살았으면 보상받아도 될 것 같았다. 그 보상이 연구년이 될 것 같았다. 연구년 신청과 동시에 나는 이미 연구년에 선정된 사람 같았다. 하루하루 연구년 동안의 삶을 설계했다. 


  우선 지금 쓰고 있는 장편 소설을 완성하고 싶다. 엄마의 삶과 내 삶을 녹여낸 소설. 필력이 부족한 초보 작가는 소설을 틈틈이 쓸 수 없다. 글이 잘 써지는 날이든, 글이 영 안 써지는 날이든 몰입해야만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다. 한, 두 달 글만 쓰고 싶다. 늦은 나이에 다시 시작한 이 기회에 온 힘을 다 쏟고 싶다. 그리고 머릿속에 구상하고 있는 단편 소설도 완성해야지.


  가을엔 가족들과 스페인에 갈 예정이다.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아들과 함께 볼 것이다. 가우디의 건축물을 보면서 끝없이 감탄하겠지. 그렇게 우리 가족은 한없이 푸른 스페인 가을 하늘 아래서 행복할 것이다. 


  한동안 상상만으로도 설레는 시간을 보냈다. 틈틈이 공문도 확인했다. 2차 면접 대상자에게만 연락을 한다고 했는데...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슬슬 불안했다. 신청하면 선정될 줄 알았던 기대가 헛된 망상일 수 있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2차 대상자 선정 날짜까지 연락이 없었다. 사람 마음이 참 어리석다. 착오가 생겼을 것이라는 기대를 아직도 하고 있으니. 마지막 확인 사살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나 보다. 공문에 있는 담당 장학사에게 이미 2차 면접 대상자에게 연락이 갔다는 말을 듣고서야 미련을 버릴 수 있었다. 


  “연구년 탈락했어요. 아, 올 한 해가 너무 길 것 같아요.”

  “위로가 필요하겠죠? 그런데 저희는 선생님이 학교에 있는 게 더 좋아요.”

  “선생님이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저희는 선생님이 연구년에 선정될까 걱정했어요.”

  “기분이 꿀꿀할 때는 매콤한 게 딱이죠. 오늘 저녁에 ○○집 갈까요?”


  문어 한 마리가 통째로 나오는 매콤 명태 문어조림. 매콤한 맛이 딱인 하루였다. 돌솥밥과 매콤 명태 문어조림을 시키자, 호박죽과 밑반찬이 나왔다. 달콤한 커피는 좋아하지만, 달콤한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호박죽을 한 입만 먹고 말았다. 대신 밑반찬으로 나온 샐러드로 입맛을 돋우었다. 먼저 매콤 명태 문어조림이 나왔다. 

  우선 문어를 먹지 좋게 잘랐다. 그러는 사이 단호박, 은행, 대추가 들어간 돌솥밥이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공기에 덜고, 솥밥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곱창김 하나를 집어 명태, 문어, 밥을 넣고 쌈을 쌌다. 쌈을 싼 김을 입에 넣으니 처음엔 김에 중화되어 매콤한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뒤늦게 매콤한 맛이 느껴졌다.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나인데도 이 집의 매콤한 맛은 중독이 되었다. 계속 김을 싸서 먹다 김에 매운 고추를 넣었다. 매콤한 맛이 처음부터 느껴졌다. 슬슬 입술이 얼얼했다. 입술이 얼얼해서일까? 쌈에 숙주나물도 넣고, 시금치도 넣었다. 쌈이 점점 더 커졌다.      


  점점 커지는 이 쌈이 꼭 나의 욕심 같았다. 간절히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 간절한 마음이 고3 생활을 견디게 해 주었다. 대학 졸업하면서 교사가 되었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한때는 교사라고 한껏 어깨가 하늘로 올라갔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간절히 원하던 일을 하고 있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축복 같은 일이다. 그 감사함을, 축복을 잊고 징징거리다니... 헛된 망상이 추잡한 욕심인 것 같아 창피했다.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잉여 교사는 절대 되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누구에게나 지치는 순간이 있다. 누구에게나 힘든 시기가 있다. 인간이기에 지치기도 하고, 힘들기도 한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혼자만 지친 것처럼, 힘든 것처럼 굴었다. 


  매콤한 명태와 문어를 싹싹 다 먹고 보니 정신이 확 들었다. 언제까지 이 자리가 나에게 허락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아야겠다.      


  나이와 경력만 앞세워 대접받기 원하는 선배 교사가 아닌 어려운 일에 앞장서는 선배 교사가 되길, 목소리만 큰 선배 교사가 아닌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는 선배 교사가 되길,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은 교사가 되길,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길 간절히 바라고 노력해야겠다. 


음식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양육하는 것이다.
- Charles Gullo-




이전 11화 루이비통 대신 레트로 냉동삼겹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