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다닐 학생 때는 오지선다형에 갇혀 살았다.
모든 문제는 정답이 있고 나는 5가지의 후보 중 정답을 골라내야 했다. 5가지 중 한 가지만이 정답이며 나머지 4개는 오답이다. 모든 문제의 정답은 1/5 확률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사회에 나와서도 정답은 있었다.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정답. 혹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정답.
집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정답.
집값이 떨어졌을 때 샀다면 정답.
내가 집을 산 시점이 고점이었고 이후에 집값이 후루룩 떨어졌다면 그건 오답.
노후 준비가 되어있다면 정답. 아니면 오답.
학생 때의 시험처럼 채점하고 객관적인 점수가 나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회에도 암묵적인 정답과 오답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모든 결정에 정답만을 고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어떤 결정을 내리면 내가 더 잘 살 수 있을까, 더 행복할 수 있을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인생은 오지선다형이 아니었다. 선택지는 무한했고 그에 따른 결과는 무한대였다. 정답은 불변의 것이 아니었고 때에 따라 달라졌다.
(((20살때 나는 대부분의 고등학생과 학부모가 꿈꾸는 명문대에 입학하여 서울로 입성하였다. 그때는 공부를 잘해서 서울로 가는 것이 다들 정답인 듯 말했다. 그러나 지금 고향에서 가족과 자주 만나며 오순도순 살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나는 오답의 길을 걸은 듯 하다. 또 병원이라는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곳에서 시작된 혹독한 사회생활은 죽고싶을 만큼 무서웠지만 그 시기를 지났기에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해서 쟁취했던 것이 결국 내 발목을 잡기도 했고, 죽어도 싫던 것이 나중에는 내 성장의 양분이 되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의 정답이 몇 년 후에는 오답이 될 수도 있고, 지금 오답으로 채점되는 것이 불과 몇 달 만에 정답으로 바뀔 수도 있다.
생각지 않게 펼쳐지는 인생의 사건들 속에서 항상 정답인 것도, 항상 오답인 것도 없다. 결국 인생에 '정답'이란 없는 것이다.
정답은 없고 문제와 선택만 있는 삶이라면, 난 왜 그렇게 모든 결정에 살 떨리며 걱정했던 걸까. 오답을 고를까봐 노심초사할 이유가 없고 불안할 필요도 없다. 애초에 정답이란 건 없으니까. 오답인 것 같아도 정답이 되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