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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엔 샴페인 Apr 22. 2023

우리 모두 다중이

 내 안에 몇 명의 내가 있을까 세어 본 적이 있다.

마치 분신술에 능한 개인기를 가지고 있는 것 마냥 정해진 한가지 모습이 아닌, 그래서 항상 셀 수가 없었다. 어른이 되었다고 다 성장한 것이 아니다. 이 안에 모든 나를 균형있게 키우는 건 다자란 나의 몫이 되는 것이다. 부모님의 손길로 키가 자라고 세상을 배우게 되는 건 어느 시점이 지나면 오롯이 나에게로만 돌아온다. 

 모두가 마찬가지다. 자립한다는 것과 독립한다는 것엔 언제나 그만한 책임이 쫓아온다. 말 그대로 내가 떠맡기 싫어도 졸졸 쫒아다니며 은근히 괴롭힌다. 막중한 책임감은 내 안의 여러모습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도 골고루 전달된다. 그래서 언제나 나 자신의 균형이 빠그러지는 순간, 곧장 일탈로 직행하게 되곤 했다.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 사실 사회생활이란 게 회사를 다니거나, 직장을 다니거나 하는 외부적인 활동 뿐아니라,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삶을 살고 있기에 그 모든 걸 지칭하는거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장보고 운동하고 수다떨고 공부하고 일하고 하는 모든 게 다 포함된다. 그래서 이 사회생활을 통해 우리는 우리 안에 살고있는 수많은 나를 꺼집어 냈다 숨겨놓거나, 다시 조우하며 그들과 외부적으로 활동하게 되는 나와 균형을 맞추게 된다.

 지나치게 분노하는 나는 잠시 놔두고, 부드럽고 온순한, 친절한 나로 무장하고 일터를 항하게 된다. 또한 에너지 넘치고 발랄하게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그중 가장 열정 충만한 나를 꺼집어내어 장착한다. 

 우리는 언제나 표면으로 드러나는 나보다 더 많은 나를 감당하기 위해 많은 화를 꾹꾹 눌러담거나, 실망에 허우적거리고 하고, 그래서 울기도 하고, 생각의 홍수속에 휩쓸려 제대로 나를 바라보지 못하게 되는 순간들도 많이 겪는다. 잘 빠져나오면 다음날 어느 정도는 개운한 기분으로 다시 사회생활에 어울릴만한 나와 손잡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되고, 아니라면 계속 잠식당해 결국은 우울을 동반한 스트레스 중증 상태로 가기 마련이다.

 내 안의 그들과 타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밖에서 활동하는 내가 엄청난 지장을 받게 된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은 여지없이 들어맞는다. 어느 하나 잘난 거 없는 그들이어도 개중엔 좀 나은 구석이 있는 나를 찾아 우리는 사회에 맨 몸으로 뛰어든다. 

 그래서 오늘도 이리 살고, 내일도 그리할 수 있다. 생채기가 나면 며칠을 울고, 밤을 하얗게 표백하고 남을 만큼의 삭힌 속내를 달래고, 또 이 짓을 수없이 반복하고 반복하다 보면 그런대로 살만한 나를 찾게 된다. 

 언제나 그놈의 균형이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힌다. 건강한 사람이란 나 자신 속의 그들과 언제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지치면 토닥여 줄 줄알고, 보상할 줄을 안다. 나에게 내가 주는 선물은 항시 대기해야 한다. 그게 맛나게 먹을거리건, 무작정 떠나는 여행이건, 귓가를 감는 음악리스트건, 쉽게 지르지 못하는 명품옷이건, 신나는  드라이브건, 종일 퍼져 딩굴거릴 수 있는 푹신한 침대건 상관없다. 무엇이던 그들과 잘 지낼수 있는 무언가는 언제나 필요하다.   

 나 자신을 길들이는 것도 실상은 댕댕이와 냥이와 다를바 없다. 손과 발이 딱히 구분되어 있지 않은 걸 뻔히 알면서도 손을 달라고 그렇게 볶아대고, 굴러야 되고, 빵 총쏘는 손짓에 멋도 모르고 엎드려 굴러야 되고, 손가락 링을 마늘어주면 그 안에 코를 들이밀어 줘야하고, 사실 이게 왜 필요한지 댕댕이와 냥이들은 결코 알수가 없다. 그냥 시키니까 하게 되고, 하면 이뻐해주고, 좋아하는게 오게되니까 반사적으로 습득되버려 그냥 몸이 말을 듣게되는 것이다.   우리도 똑같다.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을 이 세상에 나오게 된 이상, 혹독한 현실이 이유없이 괴롭혀도, 닳고 닳은 나를 위해 꿀 같은 보상을 해주는 것. 우리는 나를 닮은 내 안의 수많은 그들과 잘 지내야만 한다. 쌍둥이도 서로 전혀 닮지 않을수도 있는 마당에, 내 속에 나도 역시 나와 다를 수 있다. 자신도 깜짝깜짝 놀랄 만큼 튀어나오는 엉뚱하거나 마주지치기 싫은 모습들을 접할 때면 진짜 나란 존재의 실체가 의심스러울 때도 있으니깐.

 그 중 잘 키워 사회생활에 던져놓아서 이게 잘 먹히면 난 사회생활을 잘하는 사람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된다. 그러니 매일매일 우리는 어찌보면 나와 조율하고 타협하며 세상을 대하는 셈이다. 누가 먼저 나가서 매 맞을래 가장 쎈놈 우선 순위로 내보내고 깨지고 들어오면, 또 다른 내가 다시 출전대기하고, 벤치워머를 자청하게 된다.

 어쨌든 먹고 살기 위해 우리가 할수 있는 건 바로 이것 뿐이다. 나와 내 안의 그들과 무슨 일이 어떻게 생겨도 잘 지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난 다음에 내 가족을 챙기고, 내 주위를 돌아볼수 있게 된다. 내가 무조건 잘 살아야 한다. 온전한 정신으로 까딱하면 헛딛여 바닥으로도 추락할 수 있는 이 외다리에서 무조건 균형잡고 볼 일이다. 

 밤이 깜깜한 이유는 우리 안의 수많은 그들과 같이 조용히 울수 있도록 세상이 조명을 꺼주는 것이다. 조명을 줄여주고 별빛과 달빛만으로 분위기를 북돋아주면, 우리는 그제서야 들킬염려 하나없이 그들과 함께 펑펑 울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아무일 없는듯이 그들과의 화해의 징표로 밝은모습으로 세상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된다. 

 하루를 버티는 힘은 당신 안의 그들과의 사이에서 나온다. 잘 지내길 바란다. 밤은 항상 오고, 별도 달도 언제나 떠 있다. 잘 보이지는 않을 때도 많지만 말이다. 밤이 계속되는 이상, 우리는 언제나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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