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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르마소 May 17. 2023

좋은 포도로 와인을 빚어야 하는 이유

생명력이 결정하는 발효의 맛

30년 된 올드 빈티지 와인

얼마 전 지인분 덕분에 1994년에 생산된 와인을 마실 기회가 있었다. 평소에는 1~5만 원 가격대의 비싸지 않은 와인을 마시기에 무려 30년 전에 생산된 와인은 마시기 전부터 기대감이 높았다. 와인 용어에서 빈티지는 '포도를 수확한 해'를 가리킨다. 그리고 오래된 와인들은 '올드 빈티지'라 부른다. 즉 말 그대로 오래전에 생산된 와인이란 의미이다.


 그렇게 와인을 막 개봉하려던 참이었다. '툭'. 와인 오프너에 반틈 잘린 코르크가 덩그러니 뽑혀 나왔다. 이런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처음에 와인 오프너를 코르크에 깊게 넣었는데 이런. 와인바를 운영하시는 사장님의 말을 들어보니 올드빈(올드빈티지)은 종종 이런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올드빈용 와인 오프너도 따로 있다고 하셨다.


 다행히 이런 경우가 익숙하신 와인바 사장님이 해결해 주셨다. 병목에서 미처 나오지 못한 코르크를 길쭉한 도구를 사용해 와인 안으로 마저 밀어 넣고, 디캔터에 와인을 모두 따라낸 다음 떠다니는 코르크 가루들을 건졌다. 와인병 안에는 반동 간 난 코르크가 홀로 남겨졌다.


 그렇게 어렵게 딴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우웩'.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끔찍한 감탄사가. 국간장 같기도 하고 미묘한 신맛이 났다. 그러나 쉽게 마실 수 없는 와인이기에 홀짝홀짝 마시며 평소에 마신 와인과 다른 점을 찾으려고 애썼다. 게다가 지인분이 사 오신 와인이기에 표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 뭣했다. 그런데 같이 모임을 하는 분들의 표정을 살펴보니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맛은 별로였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와인은 오래될수록 비싸고 좋다고 생각했을테니까.



좋은 포도로 만든 와인이어야 해

 '무조건 오래된 와인이 좋은 게 아니다. 좋은 포도로 만든 와인을 오래 보관해야 한다.' 와인을 배울 때 강사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좋은 포도의 조건을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나?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이 와인이 말씀한 좋은 포도로 만든 와인의 반대의 경우란 건 맛으로 느낄 수 있었다. 숙성이 아니라 산패한 느낌이었다.


와인에서는 맛을 1차, 2차, 3차 향으로 구분한다. 1차 향은 포도 본연에서 맡을 수 있는 향이고, 2차 향은 양조 과정에서 발효 기술을 통해 발현되는 향이다. 그리고 3차 향이 숙성을 통해 발현되는 향이다. 그을린 오크나무통에서 발현하는 초콜릿향이나 병에서 오래 보관해 나는 젖은 나뭇잎, 버섯 향 등이 있다. 그래서 영빈티지(생산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와인)는 풍부한 1차 향을 즐길 수 있고, 그에 반해 올드 빈티지는 1차 향은 조금 약해지지만 추가로 발현된 2차, 3차 향을 더 맡을 수 있다. 좋은 올드 빈티지 와인은 1차, 2차, 3차 향이 고루 균형을 이룬다. 그래서 농축된 과실향과 숙성에서 오는 풍미를 동시에 맡을 수 있다.


 반면 내가 마신 와인에게 30년은 너무 긴 시간이었나 보다. 좋은 포도로 생산한 와인은 오래 보관할 수 있어 '숙성잠재력'이 높다고 이야기한다. 30년의 시간은 이 와인의 숙성잠재력을 넘어선 긴 시간이었다.



와인과 빵 그리고 발효와 부패

 숙성잠재력이란 와인뿐 아니라 발효가 일어나는 빵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책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의 저자이자 빵집 사장님인 와타나베 이타루는 천연균을 이용해 빵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천연균을 이용해 여러 가지 실험을 했는데, 어떻게 쌀을 재배했느냐에 따라 주종이 발효되거나 혹은 부패했다. 예를 들어 비료를 준 유기재배 쌀을 써서 주종을 만들면 악취를 풍기며 부패했고, 자연재배한 쌀을 쓰면 향긋한 향을 풍기며 발효되었다. 자연재배한 쌀은 퇴비를 주지 않은 쌀을 가리킨다. 외부에서 유입되는 영양분이 없기 때문에 작물은 어떻게든 뿌리를 깊게 내려 땅 속에서 영양분을 찾는다. 척박한 환경에서 생명력이 강한 작물이 탄생하고, 이후에 다른 균과의 화학작용에서도 부패하지 않고 견뎌 발효할 수 있는 것이다.


 와인도 일부로 척박한 환경을 만들어준다. 농장주는 포도나무밭에 물은 찔끔찔끔 죽지 않을 만큼만 준다. 그러면 포도나무는 수분을 찾으려 뿌리를 깊게 내리고 비로소 '떼루아', 즉 땅의 맛을 품게 된다. 생명력이 곧 맛을 좌우하는 셈이다. 올드 바인으로 불리는 수령이 오래된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와인이 좋게 평가받는 이유도 비슷하다. 세월이 지나면서 뻗어나간 깊은 뿌리 덕분에 일정하고 농축된 맛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발효와 부패란 인간이 만든 기준이다. 우리에게 유익하면 발효, 해로우면 부패. 그러나 발효와 부패가 일어나기 이전에 우리가 작물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거꾸로 생각해 볼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부패하지 않을 강한 생명력을 품도록 환경을 조성해 주었나?


 칠레에 '코노 수르'라는 친환경 와이너리가 있다. 탄소 배출이 없는 자전거로 와이너리를 돌아다니고, 오리를 풀어 벌레를 잡는다. 아마 그들은 알고 있지 않을까? 포도를 존중할수록 인간은 풍미 좋게 발효된 맛있는 와인을 마실 수 있다는 걸 말이다. 오늘은 코노 수르의 시원한 와인   마시며 지속가능한 생명력의 맛을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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