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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담기 씨소 Oct 23. 2024

열 두 살이 되는 날

[열두 살이 되는 날]

                                씨소 에세이


 매주 목요일 나는 열두 살이 된다. 무채색이었던 내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면서 서서히 다채롭게 물들고 있다. 어릴 적 내 꿈은 화가였다. 어른이 되면서 내 꿈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어느 순간 ‘지금 하는 일이 천직이겠지’ 스스로 위로하며 묻어버렸다.

 천직이라 생각했던 내 밥줄이 흔들렸을 때 비로소 나를 되돌아보았다. 어린 시절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살포시 고개를 들었다.


 중학교 2학년 새 학기가 되자 미술 선생님이 부임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선생님이었다. 미술 시간이 되면 반 아이들은 선생님께 예쁘게 보이려고 교탁 위에 사탕을 올려놓기도 하고, 미술실 청소를 하겠다며 앞다투어 신청했다.

 나도 사춘기 소녀인지라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나는 답답할 정도로 말이 없고 수줍음이 많았다.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건넬 용기가 없어서 늘 혼자였다. 혼자인 것이 불안해서 습관처럼 연필을 꼭 쥐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을 쏟아내듯 난 연습장에 항상 그림을 그렸다. 얇은 연필선이 쌓이고 쌓여 형태가 또렷해지고 견고해지는 과정이 좋았다. 내가 뭘 그리는지, 무엇을 하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연필만이 유일한 친구였다. 이런 내가 선생님의 관심을 받거나 칭찬을 듣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날, 불가능한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 선생님은 화선지를 넓게 펴서 국화를 그렸다. 그리는 과정을 보면서 나는 검은 먹으로 여백의 미를 살리며 여유롭게 그려내는 동양화에 흠뻑 빠져들었다. 선생님이 나눠 준 화선지에 농도를 조절하며 조심스레 그렸다. 내 옆을 지나가던 선생님이 발걸음을 멈췄다. 순간 내 심장도 멈춘 듯했다.

 ‘왜. 무슨 일이지. 내가 뭘 잘못했나.’

 선생님은 유심히 그림을 보면서 내 가슴에 달린 명찰을 응시했다.

 “이름이 희수구나. 희수야, 혹시 그림 배운 적 있니? 정말 잘 그렸다.”

 선생님의 칭찬 때문일까, 난 그림이 더 좋아졌다.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다. 치열하게 그린 결과 미술대회에서 수상도 했다. 화가가 되어 전시도 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미래를 꿈꿨다. 하지만 내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보수적인 아버지는 내 꿈을 무시했다.

 예술은 배고픔의 연속이라고. 동양화는 취업도 안 되고 사회에서 쓸모없는 분야라고 냉정하게 내 의사를 꺾으셨다.

 아버지의 뜻대로 나는 중국어를 전공했다. 아버지 덕분에 어딜 가나 외국어 하나는 잘하는 사람으로 통했다. 외국어 하나로 돈도 벌고 경력도 쌓았으니 아버지께 감사해야 하나. 지금 살아계셨다면 여든아홉인 아버지.      


 어둑한 밤 수많은 생각에 내 맘은 먼 과거를 달린다. 피어보지 못한 안타까움에 밤새 몸부림친다.

 만약, 내가 동양화를 전공했다면...

       어린 시절 내 꿈을 펼쳤다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세월이 흘러 첫 아이가 대학생이 되었다. 나 또한 아버지처럼 진로에 관여했고 반대했다. 딸아이는 디자인을 전공한다. 내 과거를 돌아보며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피는 못 속이는구나. 좋아하는 것도 닮네.’     

 매주 목요일 오후가 되면 우리 집 거실은 그림 공간이 된다. 12살 아이들이 큰 책상에 둘러앉아 4B연필로 사사삭 선을 그린다. 차갑게 느껴졌던 무채색 도화지에는 어느 순간 봄처럼 따뜻한 그림이 담겨있다. 딸아이의 붓 터치 하나에 섬세하고 아름다운 그림이 되는 과정은 내 안의 나를 부른다.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면서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내 존재를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
 딸아이가 그림 수업을 하는 동안 나는 출구를 찾는 아이처럼 주변을 서성거린다. 어느 날 스케치북과 붓, 작은 팔레트가 배송되었다. 내 마음을 눈치챈 딸아이가 준비한 선물이었다.
 첫 미술 시간에 나는 아이들에게 인사를 했다.
 “얘들아, 반가워. 나는 오늘부터 너희와 그림을 그릴 거야. 나이는 많지만 나를 5학년 2반 친구라고 생각하면 안 될까?”
 아이들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이들 얼굴이 무표정이다. 나는 생각 없는 이상한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는 찰나, 박수 소리가 들렸다.
 
 “같이 그림 배워서 좋아요.”
 아이들 눈매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난, 목요일이 좋다.
 대학생 딸아이는 내 스승이 되고, 나는 12살 소녀가 되어 엉킨 실을 풀어내듯 천천히 어린 시절 꿈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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