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텐조 May 25. 2024

쨈 만들기

성장일기 벽돌시리즈 283

성장일기 벽돌시리즈 이백팔십 삼 번째



친척이 앵두를 엄청 주셨다. 그래서 앵두로 쨈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앞서 이모도 앵두를 받아갔는데 육두문자를 하면서 나무 국자를 저었다고 하셨다.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왜 그런 욕이 나왔는지 이해가 갔다. 딸기와 달리 앵두로 쨈을 만들 땐 앞서 한 단계가 더 있다. 씨앗이 있기 때문에 뭉개서 분리하고 과육만 따로 빼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부모님이 다녀오시자마자 앵두를 으깨기 시작했고 금세 앵두 과육을 설탕과 함께 통에 넣고 젓고 있었다. 양심이 당연히 찔린 나는 나머지 40-50분간 나무국자로, 설탕과 과육들이 진정한 쨈으로 거듭날 때까지 신나게 젓기로 했다. 속도 모르고 신나게 나무국자로 젓기 시작한다. 거뜬하다 뭐 이 정도쯤이야! 5분 경과, 팔이 슬슬 당긴다. 쨈이 진득해지면 해질수록 과학상식을 몸소 배우게 된다.


젓기가 그만큼 힘들어진다. 10분 경과, 슬슬 민심이 이반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냥 사다 먹으면 되지 않나?"라는 마음속 궁시렁과 함께 왼손 오른손 풀 교대근무로 계속 젓고 있다. 아마 옆에서 누군가 관찰 카메라로 찍었다면 실시간으로 일그러지는 표정이 볼 만 했을 것이다. 30분 정도 경과하자 중불에서 약불로 계속 젓고 있었는데 여전히 물기가 표면 위에 비치고 있었다. 


조금 센 불로 올렸다. 그러자 마치 내 마음을 반영이라도 한 듯 쨈이 울그락불그락하더니 용암처럼 튀기 시작했다. 데었다. 급히 고무장갑을 다시 쓴 채 중불로 전환하고 다시 인고의 젓기를 계속한다. 돌리고 돌리고 가끔, 쨈 통에서 국자로 장난을 치며 휘저었는데 M자 모양으로 젓다가 회오리 모양으로 젓다가 겉에 들러붙었을까 봐 표면을 긁어내며 젓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계속 젓는다.



쨈이 색깔이며 점도를 보아하니 팥죽처럼 보였다. 새알을 넣으면 딱이라는 상상과 함께, 40분 정도가 되자 물기가 보이지 않고 죽처럼 진득해졌다. 조청처럼 꾸덕해졌다. 이내 완성하고 열을 식히고 있다. 이모가 왜 자기가 만든 쨈을 아무도 주지 않을 것이란 선언을 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여하튼 가내 수공업으로 만든 쨈 만들기는 생각보다 어렵다. 그리고 공장에서 생산하는 쨈의 소중함을 알 수 있었다.


가끔은 골치 아픈 일상에서 정말 별 의미 없어 보이는 행위에 몰입하면 스트레스가 날아간듯한 느낌, 상쾌한 기분마저 든다. 몸은 힘들지만 단순히 휘젓는 행위에 멍 때리고 하고 있으니 그 시간만큼은 뭔가 정신적인 휴식을 한 것만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심리학에선 잡크래프팅(Job Crafting)이란 개념이 있는데 업무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재설정하는지에 따라 심리적으로 건강한 일상을 보낼 수 있음을 시사한다.


마찬가지로 단순히 잼을 젓는 행위에도, 잡크래프팅은 그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당사자가 어떻게 재설정할지는 그의 손에 달려있다. 오늘 같은 경우는 나와 크게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담 없이 하면서 몰입한 것처럼 왠지 평소에 하는 일에 대해 부담감이 있는지 아니면 너무 힘들게 생각하고 있는지 되물을 수 있는 시사점을 주는 것 같았다. 스스로의 주관적 만족감이나 행복감이 중요하다는 것은 한 가지 분명해 보인다.

이전 07화 끝의 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