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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인 Mar 14. 2022

맑은소리 짠 1

20대 단골 술집에 빠져 산 술독 에세이

“자~ 잔 들고 우리 맑은 소리 짠 하자!”


이자카야와 포장마차 그 중간쯤 되는 한 육회 집에서 내 목소리에 맞춰 친구들은 잔을 치켜들곤 했다. ‘맑은 소리 짠’은 소주잔의 밑을 엄지와 검지로 얇게 잡아 잔끼리 부딪칠 때 나는 소리를 말한다. 물론 잔을 대충 부딪쳐도 소리는 여전히 맑지만 소주를 가득 채운 밑 잔을 잡아 부딪치는 소리의 영롱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알 사람은 알 것이다. 나는 취기가 어느 정도 달아오를 때 더 맑은 소리를 듣고 싶어 친구들에게 많이 외쳤다. 내가 이 말을 면 친구들은 “아, 얘 시작됐다”라며 슬슬 겁을 먹곤 했다. 마음 깊은 곳 일상 속에 쌓인 긴장감과 스트레스가 술 몇 잔에 풀려 버리는 순간 나의 술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말을 특히 많이 했던 곳이 있다. 경기도 광명에 위치한 한우 육회 집이다. 나는 경기도 광명에서 30년을 산 토박이라 광명에 있는 술집이란 술집은 스무 살 때부터 죄다 꿰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술을 좋아하시는 부모님을 보고 자라 나의 유전자도 주당의 피를 타고난 사실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나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동네 친구들과 골목을 샅샅이 훑으며 술을 마시러 다녔다.

2008년에 개업한 그 육회 집은 내가 스무 살이 된 시점과 마침 맞물렸다. 체인점으로 시작했던 그 집은 점차 동네 맛집으로 등극하고 몇 년 뒤 체인점 간판을 떼고 개인 상호로 바꾸는 과정 전부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맛 등극의 공신에는 나와 친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많이 갔을 때는 주에 한 번씩은 가는 꼴이었으니 대학교 때 아르바이트로 번 용돈을 술값으로 갖다 바친 셈이었다.


아마 처음 갔던 기억이 좋아서 단골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스무 살의 어느 날 고등학교 때 친했던 남사친이 자기 친구를 소개할 테니 같이 술을 먹자고 해서 처음 가게 되었다. 소개받았던 친구가 키가 크고 잘생겼던 걸로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니 시작이 좋았었네.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그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잘생긴 친구의 얼굴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왁자지껄 웃으며 떠든 그날의 분위기, 계속 부딪치는 술잔, 집으로 걸어가던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기분 좋은 설렘추억으로 남아있다.

이후 친구들과 돈이 없는데 고급 안주를 먹고 싶다면 특히 이곳을 찾았다. 지금은 가격이 좀 올랐지만 당시엔 한우 육회 200g 한 접시가 16,000원이었다. 양과 가격만 보면 저렴한 가격은 아니었지만 육회와 함께 나온 진한 소고기 뭇국이 일품인 데다 무한리필이었다. 육회 한 점을 소주와 함께 먹고 나서, 가스버너 위로 팔팔 끓고 있는 고기 국물을 한 입 떠먹으면 방금 먹었던 술이 해장되는 기분인 것 같았다. 해장했으니 어째, 또 한잔 마셔야지. 그러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무를 한 입 베어 물면 또 술을 부르는 맛이었다. 연거푸 초록 병이 늘 수밖에 없었다.


내 연애의 기술을 발전시킨 곳도 그곳이었다. 당당하게 맛집이라고 소개하며 썸 타는 남자들을 모두 이곳으로 끌어들였다. 그 남자들이 집이 멀다고 투덜대도 광장시장 육회보다 훨씬 맛있으니 그 정도 거리는 감안하라며 자신 있게 불러들였다. 좁은 테이블 사이로 빨갛고 싱싱한 육회를 밝히는 주황색 조명은 나를 피부 미인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거기다 구김살 없이 사장님한테 “이모~”라고 부르며 소주와 뭇국을 추가했던 나는 내가 봐도 당당하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맑은 소리 짠’까지 술에 취해 애교 목소리를 겸비해 외치면 백발백중 솔로 탈출에 성공했다.

물론 썸만 탄 것은 아니었다. 사랑싸움도 그곳에서 무수하게 펼쳐졌다. 남편과는 4년을 만나 결혼을 했는데 연애 2~3년은 이 육회 집에서 줄곧 데이트를 했었다. 20대 중반에 쥐꼬리만 한 신입사원 월급으로 시킨 육회를 한 점 한 점씩 아껴먹으며 소고기 뭇국을 무한리필 해댔다. 그러다 술병이 늘어갈수록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평소의 서운함이 잔에 소주를 따르듯 철철 흘러나왔다. 뭐가 그렇게 서운하고 서러웠는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곳에만 가면 서운함을 토해냈었다. 그곳에서 싸우고 울고 마시고 화해를 몇십 번을 반복한 끝에 우리의 관계를 진지하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삼십 대가 되자 뻔질 나게 드나들던 육회 집에 점점 발길이 뜸해지게 되었다. 결혼하자 광명이 아닌 옆 동네 시흥으로 터전을 잡아 자연스레 멀어진 게 이유이기도 하고 나이 들수록 점차 맛있는 안주들이 세상에 많다는 것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별개로 또 알지 못할 마음도 있다.

20대에는 정말 철이 없고 순수했다.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좋아해 주는 친구들과 함께 잔을 부딪쳐서 행복했다. 하지만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술을 마시면 조용히 넘어가는 일들도 뾰족해져 무수히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났었다. 게다가 나는 이십 대 후반이 되자 하루빨리 성숙해지고 싶었고 커리어를 성장시키고 싶었다.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그곳에서의 왠지 나의 철없고 미숙하기만 했던 시절이 생각나 불편한 기분이 든다는 걸 느꼈다. 그런 나의 20대를 마주하지 않고 그저 추억으로 남겨두고 싶어 어느새 찾지 않았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오랜만에 그 술집을 떠올리니 20대의 내가 그립고 보고 싶어진다. 지난 시절을 한 번 되돌아보고 사람들과의 추억도 떠올릴 겸 조만간 그 시절 친구들과 그곳에서 ‘맑은 소리 짠’을 외쳐야겠다.


(20대에 친구들과 육회 집에서, 육회 사진은 없고 술 기운 가득한 사진만 잔뜩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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