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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인 Apr 04. 2022

벚꽃보다 포차가 좋아

부산으로 벚꽃 여행 갔다가 술만 먹다 온 부부 이야기

지난주 남편과 오랜만에 부산에 갔다. 부산은 우리가 연애하고 처음 여행에 간 곳이라 의미 있는 도시이다. 그때만큼의 설렘은 덜하지만 내 남자와 함께 할 수 있다는 행복, 안정감이 교차했다. 테마도 정했다. '힐링'과 '벚꽃'이었다. 지난달 나는 코로나 확진자가 되어 2주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원래 집순이긴 하지만 자발적으로 밖에 나가지 않는 것과 강제적으로 집에 있는 것과의 차이는 컸다. 1주일 동안 꼬박 아팠고 다음 1주일은 무기력에 시달려야만 했다. 무기력도 코로나 증상인지를 찾아볼 정도로 평소와 다른 내 모습에 당황스러웠다. 시간이 지나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고 나니 정신이 돌아왔다. 밀려있는 일을 하나씩 쳐내면서 다시 '나'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꼈다.


날이 많이 따뜻해졌고 완연한 봄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계절의 변화를 느낀 우리 부부는 잠재운 역마 기운이 눈을 뜨는 듯했다. 근 한 달 동안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하지 못했다. 결혼하고 집에서 하는 데이트는 데이트가 아니었다. 집에 함께 있는 시간은 좋지만 밖에 나가야지만이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신경 쓴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집에서는 둘 다 편하게 널브러져 있으니 서로 예쁘게 치장하고, 맛있는 음식점에서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하는 게 데이트다운 데이트였다. 확진자가 다섯 명 중에 한 명씩 걸리는 요즘 밖에서 데이트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더욱이 여행이 고팠는지도 모른다.


여행 시작 당일은 한겨레 교육원에서 에세이 강의가 있는 날이었다. 수업이 1시에 끝나 남편과 서울역에서 만나서 출발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날따라 선생님의 수업이 길어졌다. 평소에 이론 1시간, 합평 1시간으로 수업을 진행하셨는데 이론을 1시간 30분 동안 하셨다. 배우는 입장에서 더 많은 걸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께는 감사하지만 ktx 출발 시간이 2시 30분이라 늦어도 1시 30분에는 학원에서 나와야 했다. 여유 있게 출발 시간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변수가 생긴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초조해졌지만 다행히 수업에 참석한 학생들이 평소보다 적어서 합평 시간이 짧아 예상보다 일찍 끝났다. (선생님은 역시 다 계획이 있으셨다)


나는 서울역에 남편보다 먼저 도착했다. 화장실에 다녀오고 탑승구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멀리서 훤칠한 남자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남편을 밖에서 따로 만나니 연애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결혼 4년 차인데 아직도 이렇게 설레고 좋은 게 신기할 뿐이다. 우리는 손을 잡고 열차에 올랐다.

서울역을 지나 영등포로 가는 도중에 창밖으로 한강과 63 빌딩이 보였다. 자주 봤던 풍경인데도 기차에서 보니 기분이 남달랐다. 63 빌딩이 이렇게 멋있는 건물이었나? 여행이 주는 설렘 때문인지, 오랜만에 밖에서 데이트하는 설렘 때문인지 세상이 전부 아름답게 보였다.



기차에서 읽으려고 가져온 책을 펼쳤다. 김애란 작가님의 '칼자국'이라는 책이다. 현재 수강하고 있는 필사 수업에서 인용하는 문장들이 많아 읽어보려고 가져왔다. 문체가 감각적이고 예사롭지 않아 수업에서 왜 이 책을 추천했는지 알만 했다. 문체가 두부 같달까, 마음을 부드럽게 건드리는 문장들이 많았다. 작가님 어머니의 이야기라 엄마가 생각이 나서 눈물도 찔끔 났다.

책이 얇아서 뚝딱 읽었다. 그러자 마치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졸음이 밀려왔다. 아침에 짐을 싸고 오전에 수업을 듣고 부리나케 역으로 달려와서 피곤할 만도 했다. 점심도 먹지 못해 배에서 밥 달라고 아우성도 요란했다. 그냥 잠이나 자자. 나는 눈을 감았다.


5시를 훌쩍 넘은 시각에 부산역에 도착했다. 택시를 잡아 예약해 둔 호텔로 가서 짐을 풀었다. 우리는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호텔을 나왔다. 간 곳은 호텔 바로 앞인 영도 포장마차 거리였다. 날씨도 따뜻해졌겠다, 여행도 왔겠다, 바닷바람도 들이킬 겸 포장마차에서 저녁을 먹고 싶었다. 밖에서 음식을 먹으면 마스크를 벗고 바깥공기를 쐴 수 있어 더욱 포장마차를 원했다. (실은 여기에 가려고 근처 호텔을 잡은 것이다) 낮에는 주차장으로 운영하고 저녁엔 포장마차로 변신하는 멋있는 곳이다. 부둣가를 따라 일자로 나열된 포장마차는 나에게 그 어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저리 가라 했다. 우리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부산 영도 포장마차, 통영집


6시가 조금 안 된 시각, 이미 술 병이 꽤 보이는 테이블도 있었다. 우리 부부도 이에 질세라 주문을 서둘렀다. 기본 안주로 방울토마토, 오렌지, 계란 프라이가 나왔다. 계란 프라이에 젓가락을 갖다 대니 기다렸다는 듯이 노른자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소주잔을 부딪쳤고 노른자를 가득 묻힌 계란 프라이를 한입 넣었다. 그 순간 남편과 눈이 마주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무슨 프라이가 이렇게 맛있지? 간도 적당하고, 흰자와 노른자가 부드럽게 어우러져 메인 안주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런 우리를 보고 사장님은 "우리 집 계란 프라이 맛있죠?~ 어떤 손님은 열 번을 리필해요~!" 사투리 섞인 억양으로 환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자부심이 넘치는 사장님을 보고 나는 확신했다. 계란 프라이를 이렇게 맛있게 하는데 메인 안주는 맛을 안 봐도 이미 합격이었다.


부산 영도 포차 거리는 LA갈비가 유명하다. 가게마다 숯불 화로 통이 하나씩 있는데 거기서 갈비를 구워준다. 노릇노릇 맛있는 간장 양념 냄새와 불향을 가득 입힌 LA갈비의 맛은 일품이었다. 그냥 먹어도 맛있는데 고추냉이를 살짝 올리고 먹는 고기는 또 색다르게 맛있었다. 이제 배도 채웠겠다, 국물 안주를 시킬 타이밍이 왔다. 우리는 어묵탕을 시켰다. 그런데 내가 아는 그 어묵탕이 아니었다. 바다를 머금은 꽃게 집게 발이 어묵을 살짝 잡고 있는 게 아닌가. 전에 어묵집에서 꽃게로 국물을 낸다는 것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크게 한 술 떠먹어보니 꽃게와 어묵의 조합은 예술이었다. 밤이 깊어져 약간 쌀쌀했는데 뜨끈한 국물을 먹으니 다시 술자리가 시작되는 기분이 들었다. 이어서 안주 2개로는 아쉽다며 시킨 꼼장어 구이가 나왔다. (소주도 같이) 꼼장어도 말해 뭐해.. 그동안 먹었던 꼼장어는 불에 구워도  약간 비릿한 향이 조금은 남아 있었는데 이건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담백했고, 빨간 양념이 불향을 머금어 꼼장어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소주 한 병이 네 병으로 늘었다.


쌀쌀한 바닷바람, 시끌벅적한 사람들 웃음소리, 어두운 밤바다를 비추는 포장마차의 불빛이 아름다웠다. 부산 영도 앞바다의 포차는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나 미각적으로나... 나의 오감을 모두 만족시켰다. 남편에게 부산 오면 여기는 또 오자며 여행 첫날을 마무리했다.


벚꽃은 이미 잊힌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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