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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인 Jan 12. 2022

남편의 취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아내의 죄책감

서로가 가장 친한 술친구면서

우리 집 남자는 술을 좋아하고 잘 마신다. 남편만큼 잘 마시는 건 아니지만 나도 술을 좋아한다. 그와의 연애도 술 덕분에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편과는 같은 과 대학 선후배로 만났다. 그에게 호감 있는 내가 밥 잘 사 주는 누나인 척, 그를 꼬드겨 술집에 데려가곤 했다. 당시에는 그에게 여자 친구가 있어 마음을 전하지 못했다. 이후 3년이 지나 다시 만난 그는 여자 친구와 군대 문제가 모조리 해결되어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이번이 기회다 싶어 술기운을 빌어 그에게 고백했는데 지금은 어쩌다 같이 살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카페보다 술집에서 데이트했고 어딜 가나 술과 함께였다. 술을 마시며 가치관을 이야기하고 가끔 터놓는 깊은 이야기가 관계를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물론 서운한 이야기를 하다 술 먹고 대판 싸운 적도 가끔 있었지만 그런대로 또 그게 좋았다. 어쨌든 우리 부부에게는 고마운 존재다.


그랬던 술이 결혼하고 나서는 싫어지기 시작했다. (마시는 건 늘 좋은데)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술을 마신 남편이 미워졌다고 해야 하나? 연애할 때는 함께 마셔 좋았는데 결혼하고 나서는 각자의 술자리가 있어 그곳에서 마시고 들어오는 그가 미웠다. 이유는 너무 많이 마시기 때문.


나도 엄청난 애주가이고 술주정도 있는 편인데도 불구하고(이력이 화려하다) 남편을 이해 못 하는 건가 싶어 죄책감에 시달리곤 했다. 그런데 싫은 건 싫은 거였다. 술에 취한 그의 모습이 싫었다. 이건 무슨 심보일까? 술에 취한 그에게 화를 내고 나면 마음이 좋지 않다. 나조차도 술 먹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될 것 같은데, 아니면 나랑 마시지 않고 다른 친구들과 마셔서 심통이 난 걸까? 사랑하는 남편인데 뭐가 그리 화가 날까 싶다가도 취한 그의 모습을 보면 여전히 화가 난다.


이유를 좀 더 세부적으로 찾아보기로 했다. 일단 늦게 들어오는 게 싫다. 늦게 들어온 만큼 거하게 마시고 들어온다. 몸을 못 가눌 정도는 아니지만(못 가누면 들어오지도 못하겠지) 늦게 들어오는 주제에 편의점에서 맥주와 도시락을 한 뭉치 또 사서 들어온다. 그리고 같이 먹자며 자고 있는 나를 깨우려고 본인의 몸으로 누른다.(그의 몸무게는 100kg이 살짝 넘는다..) 더 마시려고 사 오는 것도 이미 미운데,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든 나를 무거운 몸으로 깨우는 것은 그의 무게만큼 내 분노의 게이지만 높이는 일이다.


이런 주사가 자꾸 싸움이 되어 적당히 먹을 정도의 귀가 시간을 정했다. 합의하여 정한 시간은 11시. 길어지면 12시까지는 양보했다. (정하지 않으면 1시~2시에 들어온다. 화가 날만 하지 않은가?) 그런데 시간을 정해주니 일찍부터 마시는 것이었다. 남편에겐 유레카지만 나는 한숨을 내쉰다. 앞당긴 시간만큼이나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것이다. 일찍 들어오는 만큼 술을 덜 마실 줄 알고 시간을 정한 건데 말이다. 따라서 그의 술주정 루틴은 변함이 없었다.


다시 약속을 바꿨다. 어쩌면 지금 실험 중이니 가설을 바꿨다고 해야 하나. 이번에는 취하지 않을 주량을 정하고 시간을 동일하게 유지했다. 그의 주량은 소주 세 병 정도인데, 요새 사케나 와인을 먹는 그에게 무엇을 마시든 한 병으로 정해줬다. 그럼 기분 좋게 들어올 것 같았다. 그러더니 주량과 시간은 지켰지만 여전히 편의점 루틴은 계속되었다. 덜 마셨다는 같잖은 이유를 대며 또 사 오는 것이었다. 일찍 들어온 걸 자랑스럽게 여겨 집에서 더 먹는단다. 그럼 결국 내 잠을 깨워 같이 먹자는 소리이다.


더 이상 나도 폭발할 수밖에 없다. 술 먹으러 가는 것도 얼마나 마실지 몰라 나를 걱정시키면서, 왜 다 먹고 와서 가만히 잘 있는 나를 술주정으로 괴롭히냐며 그동안 참고 참았던 가슴 깊이 쌓아둔 분노를 폭파시켰다.

내가 이기적인 걸까? 주량과 약속시간을 지켰으면 집에서 한잔 더 먹겠다고 하는 그를 위해 잘했다고 대작을 해줘야 하는 건가? 그게 아내의 덕목일까? 수없이 고민했다. 물론 같이 먹는 날도 있다. 하지만 그가 약속 있을 때마다 내가 먹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도 다음 날 일정이 있지 않은가. 몇 번을 반복해서 먹어주다 보니 그가 더 이기적이라고 생각해서 불편한 마음과 상황을 다시 이야기했다. 술 취할 때 이야기하면 기분 좋은 말도 싸움이 될 수 있어 (다 겪었던 일이다) 매번 술 깬 다음날에 내 마음을 빠짐없이 말했다.


“자기가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오는 거 싫어.

술에 취해 들어오는 건 더 싫어.

음식 사들고 와서 나에게 먹자고 깨우는 것도 싫어.

혼자 잘 먹고 들어왔으면 바로 씻고 잤으면 좋겠어.

정 먹고 싶으면 컴퓨터 방에서 먹는 걸로 해. 그건 뭐라고 하지 않을게”


수차례 반복되는 싸움과 실험 약속을 하는 동안 남편은 이제는 명확히 안다.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너무 싫어해서 그도 처음에는 당황했으리라. 그에게도 유예기간이 필요했다. 예민하고 깐깐한 와이프를 만나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의 노력으로 약속을 잘 지키고 있다.


요새는 코로나 시국이라 거리 두기가 강화되어 늦게까지 술 마실 일도 없어서 근 몇 개월 동안 유독 조용하다. (아! 그래서 싸울 일이 없었나?) 게다가 남편은 얀센 1차 접종자인데 1차 접종 당시 몸이 많이 아파서 접종을 그 뒤로 하지 않았다. 즉 방역 패스에 막혀 식당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 제도에 찬성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 집 남자가 이래저래 밖에서 술을 먹지 못하는 상황이라 솔직히 속으로 만세를 외친다.


'자기야 미안! 대신 집에서 나랑 마시자^^'


그래도 분명한 건 우리는 서로의 가장 친한 술친구다.

(갑자기 급 훈훈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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