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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인 Jan 24. 2022

제주 올레길 16코스를 걸었습니다

걷기 여행에서 느낀 찐 행복 에세이

지난주에 남편과 백팩 하나씩 둘러메고 제주도 여행을 갔다. 특별하게 이번 여행은 최대한 차를 이용하지 않고 젊은 두 다리로 제주 올레길을 느끼고 오는 것이었다. 우리는 화요일 밤에 제주 공항에 도착하여 공항 근처 호텔에서 짐을 풀었다.

이날이 호텔에서 즐기는 마지막 만찬이 될 수 있다며 배달 앱을 켜서 음식을 주문했다. 술이 빠지면 우리 부부의 여행이 아니지. 1층 로비에 있는 편의점에서 사 온 와인 한 병을 마시며 어떤 올레길 코스로 돌면 좋을지 얘기를 나누고 설레는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푹 자고 일어나 다음날 12시 체크아웃 시간에 나왔다. 우리는 올레길 16코스를 걷기로 했다. 호텔에서부터 걷기 여행을 시작할 수도 있지만 올레길을 걷는 그 자체에 의미를 두자며 택시를 타고 올레길 16코스 종점인 광령 1리 마을회관에 도착했다. 첫날의 목표는 올레길 16 종점에서 15 종점을 걷는 것이다. 이 구간은 지도상에서 보면 제주 공항의 왼편인 애월이 메인이 되는 곳이다.


광령 1리 마을회관에서 시작하는 코스라 초반에는 동네의 골목 어귀 구석구석을 돌았다. 골목을 돌 때만 해도 별로 힘들진 않았다. 하지만 곧이어 오르막길이 연달아 나왔다. 힘들어서 지도를 보니 고성 숲길과 안오름을 오르고 있었다. 여행 오기 3일 전에 계양산을 등산한 종아리가 잠잠하나 싶었는데, 오르막길에 오르자 이 다리로 어딜 오르냐며 뒤로 강하게 당기는 걸 느꼈다. 10kg 배낭을 메고 있는 것만으로도 겨우 버틸만했는데 숲길을 오르니까 몇 배로 중력을 거스르는 느낌이었다.



체력은 힘들었지만 올레길을 찾아 걷는 건 전혀 힘들지 않았다. 처음엔 카카오 내비를 보면서 걸었는데 점차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곳곳마다 올레길을 표시하는 깃발이 있기 때문이다. 길을 잃을 것 같으면, 어디로 가야 할지 잠깐 고민하는 사이에 주황색 올레길 화살표가 이리로 가라며 방향을 알려주었다. 주황색 화살표는 올레길 역방향을 나타내고, 또 다른 파란색 화살표는 순방향을 가리켰다. 우리는 16코스에서 15코스로 가는 역방향 주황색 화살표를 보며 걸었다. 군데군데 펄럭 거리는 깃발은 이 길이 맞는 길이라고 알려주는 듯했다. 이렇게 많은 깃발을 살면서 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깃발에 의지하는 내가 신기했다. 깃발 그 자체가 길이었다. 길을 잘못 든 것 같을 때는 깃발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확인했다. 깃발이 보이지 않는다면 왔던 길을 조금만 되돌아가면 다시 깃발이 그 자리에 있는 걸 보고 맞는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내비를 보지 않아도 길잡이가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지 몰랐다. 특히나 내비를 보고도 찾아가지 못하는 길치인 나도 길을 쉽게 찾아갈 수 있어, 척척박사가 된 것 마냥 나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가벼웠다. 표식만 따라가면 사람의 발이 아니면 닿을 수 없는 경치들이 펼쳐졌다. 차로는 절대 들어오지 못할 길이었다. 오로지 제주도 정경에 집중하여 걸을 수 있어 무겁게 짊어든 짐의 어깨와 다리는 힘들어도 경치를 감탄하며 힘듦을 덜 수 있었다.


깃발을 보며 우리네 인생도 저런 길잡이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내가 걷는 이 길이 맞는지, 길을 잃어 고개를 들고 조금만 두리번거리면 ‘아, 여기로 가면 내가 원하는 걸 이룰 수 있겠다’는 그런 길 말이다. 심지어 길을 알려주지 않더라도 지금 네가 가는 길이 잘 가고 있다고 만이라도 알려주기라도 하면 좋겠다 싶었다. 남들과 다른 길을 갈 거라며 회사를 퇴사한 지 1년이 넘은 나에게 올레길 같은 길잡이는 천군만마와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 와중에 ‘내 갈 길은 내가 갈 거야, 길은 다 통하게 되어 있어. 그래 봤자 이 세상이야’ 하면서 더 큰 모험을 택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걷다 보면 올레길 코스 중간중간에 개인 사유지를 내놓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 표지판도 있었다. 자기 땅을 내놓으면서 아름다운 이 땅을 혼자만 소유하지 않고 누구나 걷고 즐기라는 마음이 느껴졌다. 또한 동네 골목에는 개인 집 국기 게양대에 국기 말고 올레길 깃발을 꽂아 길을 잃지 말고 조심해서 여행하라는 집주인의 배려가 느껴져 감사했다. 표식만으로도 충분히 배려라고 생각했는데 본인 사유지나 자기 집 대문 국기 게양대를 기꺼이 내놓는 사람들의 배려로 만든 올레길은 경치도 경치이지만 사람의 마음이 경치보다 더 넓다는 생각이 들어 길을 걷는 내내 마음이 따뜻했다.


길을 걷다 보면 우리 부부와 같이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힘들기도 했고 동질감이 느껴져서 그런지 길에서 만나는 사람 한 명 한 명이 반가웠다. 반가운 나머지 괜스레 마주치면 미소가 나왔다. 물론 그 미소는 마스크 속에 숨어 알려줄 길이 없지만, 그들과 눈인사라도 하려고 눈을 마주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중년 부부로 보이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쳤는데 여성분께서 맑은 목소리로 밝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기다렸다는 듯이 나도 “안녕하세요”라고 답했다. 듣는 안녕하세요가 왜 이렇게 정답고 반갑게 느껴졌는지 마음이 행복했다. 코로나 시국에 거리 두기를 하는 요즘 보기 드물게 듣는 타인의 인사였다. 분명 추운 겨울의 제주인데 마음만은 따듯한 봄의 정취를 느끼는 제주가 아닌가 싶다.



물론 걷기만 한 건 아니다. 물 없이 걸었던 우리에게 마실 음료가 절실했다. 다행히 코스 중간에 무인 카페가 있었다. 전혀 가게가 없을 것 같은 곳에 위치해 있어 이 카페는 여행자를 위한 카페가 아닌가 싶다. 감귤 나무를 품은 카페 정원에서 커피 머신으로 아메리카노를 내려 마시며 목을 축였다. 냉장고에 보이는 감귤 주스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생 감귤로 만든 주스라 자연 그대로의 달달하고 새콤하여 생기를 북돋아 주는 맛이었다.


무인카페뿐만이 아니라 무인 우동 집도 있었다. 아침으로 반숙 계란 두 알만 먹고 출발해서 점심을 먹지 못해 몹시 허기졌다. 주스와 커피를 마시긴 해도 씹을 만한 걸 먹지 않으니 배가 고플만했다. 세 시간 정도 걸을 때쯤 빨간 컨테이너 박스의 식당이 보였다. 재미있게도 가게 이름이 ‘그냥 우동’이었다. 그런데 주인은 없고 식당만 덩그러니 있었다. 아까 무인카페가 있더니 여긴 무인 우동 집인가? 생각했다. 좀 더 가게를 둘러보니 가게 근처 집에 있으니 전화를 주면 바로 온다는 메모가 있었다. 남편과 나는 어차피 화장실도 가야 하고 앞으로 더 걸어야 하니 가게를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기뻐 맛이 어떻든 먹고 가기로 했다. 전화를 건지 5분이 안 돼 어떤 할아버지께서 걸어오셨다. 우리는 부산 어묵 우동을 시키고 카스 병맥으로 목을 축였다.


맛집으로 검색해서 찾아온 가게가 아니기 때문에, 맛에 대한 기대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우동 한 그릇이 대접으로 크게 나오고 국물 한 입 뜨자마자 우리는 탄식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우동을 평소 좋아하는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우동만큼은 한 그릇 더 먹고 싶을 만큼의 맛이었다. 국물이 진하면서도 깔끔했다. 면은 어찌나 탱글탱글하고 어묵은 또 얼마나 부드럽고 맛있는지. 지금 글을 쓰는 와중에도 깊고 깔끔한 우동의 맛이 생각나 군침이 넘어간다. 주인 할아버지께 너무 맛있다고, 혹시 일본에서 오신 거 아니냐며 우동 한 그릇에 내성적인 남편이 신나서 수다쟁이가 되었다. 맛있는 우동은 그의 말문을 트이게 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맥주의 힘일지도 모르겠네.



든든히 배도 채웠겠다, 다시 잘 걸어 보자며 의지를 일으켜 세웠지만 얼마 못가 발도 저릿저릿하고 다리 알은 아까보다 무겁게 더 당겼다. 역시 먹은 건 먹은 거고 힘든 건 힘든 거였다. 산언저리를 지나 내리막길을 걸어 힘이 덜 드는 구간인데도 이미 오늘의 하루 걷기 양을 초과했다고 몸에서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애월 해안 도로를 만났을 즘 우리는 근처 호텔을 잡고 첫날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16코스는 15.8km였는데 우리가 이날 걸은 거리는 12.29km였다. 쉬는 시간 포함해서 다섯 시간을 걸었다. 평소 걷기 운동을 할 때 1시간에 5km 걷는 나를 생각하면 좋은 성적은 아니다. 오르막길도 많았고, 다리가 온전치 않았던 상태, 짐 가방을 메고 걸은 핸디캡이 있긴 했어도 한 코스를 다 돌지 못한 부분이 아쉬웠다.

아쉬워도 어쩌랴.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데. 남은 거리는 다음날 걷기로 하고 이만 쉬기로 한다.


걸으면서 좋았던 점들이 많았다. 올레길 깃발과 화살표 표시, 길에서 반갑게 인사한 사람들, 뜻밖에 만난 무인카페와 우동 장인 등 걷는 내내 모든 것들이 따뜻하고 감사한 마음을 들게 해 주었다.

그래도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았던 것은 남편과의 수다였다. 평소 우리 부부는 24시간 같은 공간에 있더라도 각자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보낸다. 이렇게 오랫동안 걸어본 게 언제였나 싶다. 함께 걷는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데 아름다운 제주산과 바다를 보며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았다. 혼자 걸었으면 많이 외로울 길이었다. 올레길이 우리 부부의 인생길처럼 따뜻하고 감사한 일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힘들더라도 앞으로도 계속 이 남자의 손을 잡고 걸어갈 것이다.




*블로그에는 사진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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