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인 나만의 뇌피셜 시리즈 2
경부철도와 연결된 공주의 뜬소문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공주에 경부철도가 지나갈려고 했으나 공주에 있는 지역유림들의
반대로 들어서지 못했다!
과연 그랬을까?
이 소문으로 인해 공주는 꼰대도시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어 아직도 공주는 외부인에 대한 배척이 있는 부정적 이미지가 형성되고 있다. 마치, 조선후기에 쇄국정책으로 근대화를 받아들이지 못해 역사의 흐름에 대처하지 못했던 현실처럼...
실제로는 공주는 꼰대도시가 아니다. 사례를 살펴보면 ① 영명학교(1906년) 을 시작으로 공주공립고등보통학교(1922년), 공주공립고등여학교(1928년), 공주공립농업학교(1933년), 공주여자사범학교(1938년), 공주사범대학(1948년), 공주사범대학교부속중학교(1953년), 공주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1955년)등 다양한 학교가 있었고,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많은 학생들이 유학오는 등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는 공존도시이며 교육의 도시였다. 이렇듯이 교육도시로 자리매김한 공주는 근대신학문의 전당으로 학문을 전파하는 중요한 도시였다.
② 충청감영(1602년) 임진왜란 이후 공주로 이전하면서 대한제국이 끝나는 시점까지 300년 가까지 존재했다. 이후 1910~1932년까지 존재했던 충청남도 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충청도 중심도시인 공주는 충청도의 관문이면서 교통의 중심지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이로인해 공주는 다양한 문물이 쉽게 들어오는 곳이었고, 이를 수용하는 자세를 가지는 시민의식을 가진는 도시였다.
위 사례를 종합하면 당시 공주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살고, 사통팔달의 요충지인 중부지방의 중요한 도시이며 개방된 도시였다는 것을 당시 한양(경성) 등을 상상하면 편하다.
양반동네로 지역유림들의 반대로 경부철도가 못들어오게 했다는 것은 아마도 조선의 양반문화를 깍아 내릴려는 사람들의 고도화된 작업에서 만들어진 산물로 추측된다.
그렇지 않다라는 펙트를 찾아볼까하다?(위키백과/지역채록/신문기자 등을 참조하여 필자 재구성)
1. 공주 이인면은 찰방이 있던 곳이다. 찰방은 말을 갈아타고 갔던 곳으로 이런 곳은 서울 이태원같이 외지인들이 많이 모여서 주막 등이 번창하여 경제적 이익을 발현했던 곳으로 이해하면 된다.
-> 그래서 교통이 발달하면 돈을 번다는 인식이 있었다
2. 경부철도는 대한제국시기에 시작되어 1905년개통된 대한제국의 중추사업이었다. 1892년 답사선, 1894년 답사선, 1899년 답사선<사진2> 처럼 3번의 답사선에서 본 것처럼 마지막 답사도에는 공주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당시 청일전쟁(1894~1895년)과 러일전쟁(1904~1905년)을 이해할 필요성이 있다. 전쟁을 치루면서 일본은 부산에서 서울 그리고 중국까지 빨리 물자를 수송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알 듯이 한국은 산이 많은 지형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일본인들이 식민지로 만들어질 조선에 터널을 뚫으면서 지역을 안배해가며 철도를 건설한다는 것은 만무하다. 이런 과정에서 지역의 유림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이런 것은 존재할 수 없는 구조이다. 오히려 공주에 건설을 찬성하면 찬성했지 절대 반대는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3. 또 한번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 공주갑부 김갑순(1872~1961년/관료)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사람은 당시 대한제국과 조선총독부 관료로 일하는 현재로 말하면 공무원이었다. LH사태와 동일한 상황으로 이해하면 편할 것이다. 충청남도 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할 것을 미리 인지한 후 대전지역에 땅을 대거 구입하였고, 나중에 대전역 이전까지 정보를 입수하여 대전 여러지역에 땅을 미리 구매하여 막대한 부를 지녔다. 경성갈때 절반은 남의 땅, 절반은 본인의 땅이라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땅 갑부였다.
경부철도와 유림의 관계에 대해서는 필자뿐아니라 여러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송 교수(공주대 사학과)는 공주에 철도가 건설되지 않은 이유를 ①일제강점기의 공주는 1932년 대전으로 도청 이전 후 행정도시로서의 중요성을 상실한 점 ②근대의 핵심시설인 철도에서 배제되어 경제도시로서의 중요성을 상실 ③교육 및 역사도시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의 수립 등을 들었다.
이어 “공주유생이 철도건설을 막았다는 이야기는 도청을 가져간 대전사람들이 지어냈을 것”이라며 일제강점기 당시 경부선이 조치원 방향으로 틀어진 이유는 ①비용 과다(공주를 통과하려면 거리가 멀어지는 점) ②호남분기점인 조치원 선점(당시 조치원과 대전의 갈등) ③금강교에 철도 건설은 비용이 많이 드는 점 등을 설명했다. 이처럼 다양한 팩트들이 존재하고 있다.
공주는 공주는 공존도시, 교육도시, 개방도시, 중심도시였다. 공주는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도시였다. 그리고 그런 도시에 경부철도를 못놓게 하기 위해 유림들이 반대했다 라는 유언비어를 통해 공주 시민의식 결여와 꼰대도시로 외지인의 출입을 막는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공주시민 또한 정확한 내용을 이해하고 이를 바로잡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출처: 인천일보(2021)<경부철도 왜'안성' 제외됐나> 필자재구성
금강뉴스(2017)<공주 유생이 철도건설을 막았다구?> 필자재구성
나무위키(2024) <한국철도의 유생반대설> 필자재구성
주간조선(2015)<공주, 110년 만에 철마가 달린다>
위키백과/구글 필자 재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