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에서 시작하다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에 내린 것은 다음날 새벽 1시 50분경이었지만, 현지에서는 6시간의 시차 덕으로 당일 8시가 채 안 된 저녁 무렵이었다. 그러나 꼬박 12시간을 비좁은 공간에 갇히며 바이오리듬 상 곤히 잘 시간을 뜬눈으로 보내 극도로 피곤한 데다 주변은 어두울 만큼 어두워진 뒤라 심야 같은 느낌이었다. 공항에서 우리를 맞은 현지 한국인 가이드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그는 호텔로 이동하는 전용 버스에서 예비지식이 될 여러 가지 이야기를 쉴 사이 없이 들려주었지만 몽롱한 정신 속에서 대부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다만 초저녁임에도 창밖으로 보이는 시가지가 대도시다운 현란함보다는 침침할 정도의 불빛이었던 것은 수요 전력의 절대량을 이웃 불가리아로부터 수입해 쓰고 있으므로 절전 습관이 몸에 배어 그렇다는 설명은 남아있다.
이스탄불, 한 구절도 기억되진 않지만 어떤 노래 가사에 있었던 것처럼, 이스탄불에는 수식어나 감탄사가 붙어야 제대로일 것 같은 이름이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오래전 역사 시간에 배우고 멀리서 듣기만 하였는데도 그렇다. 그 답을 이희철의 저서 『이스탄불』에서 찾았다.
「이스탄불은 단순히 이스탄불로만 부르기엔 성이 안 차는 감동적인 도시다. 아름다운 보스포루스 해협과 골든 혼 만(灣)과 어우러진 이스탄불 전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이스탄불은 ‘아! 이스탄불’로 불러야 그 느낌이 차오는 그런 도시다.」
제대로 보고 느끼려면 9일간의 전 일정을 이 한 곳에 모두 끌어넣어도 충분치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비중을 더 두어야 하는 곳이 바로 이스탄불이고 그래서 가자마자 온 하루와 여행을 마치기 직전 또 하루를 더하여 꽉 차게 이틀의 시간을 배당하였을 것이다.
이스탄불은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있는 세계 유일의 도시이지만 유럽 쪽 이스탄불은 또 골든 혼 만(灣)을 경계로 하여 서남쪽으로 오스만제국의 구도시와 북동 방향의 신도시로 구분된다. 첫날 우리를 데려간 곳은 비잔틴 제국 이전부터 중심이었던 구시가지의 히포드럼 광장과 그 주변 볼거리들이었다. 이번 여행에 선보이는 첫 관광지는 지나간 제국의 영욕과 운명을 함께한 아야 소피아 박물관이다.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아누스에 의해 1,470년 전(537) 건립되어 오스만 튀르크 제국에 의하여 몰락할 때까지 916년간은 기독교 성당으로 존립했었다. 그러나 오스만 튀르크 시대 481년간은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하여 사용되기도 했다. 공화국 출범 후 종교를 정치로부터 분리, 자유화하면서 성당으로도 사원으로도 쓰이지 않고 공존하는 두 종교 문화를 역사유물로 인정하는 박물관이 된 것이다. 건물 내부에는 건립 당시의 많은 모자이크 기독교 성화와 후에 씌운 이슬람 문양이 함께한다. 성화 위에 회칠하고 그 위에 간결한 문양들을 넣어 한때 성당을 사원으로 변형하였으나 후세에 덧칠한 것을 벗겨내며 속에 숨겨있던 원래의 성화(聖畵)를 되살렸기 때문이다. 벗기다 잘못 훼손된 부분이나 떨어지지 않은 회칠이 남아있는 곳들, 그것들은 또한 그것들대로 격변의 역사를 대변하는 것이리라.
우리가 여러 터키여행 상품들을 놓고 고를 때 일행 중에는 소피아 성당 내부를 둘러보지 못할 것이라면 가격이 아무리 파격적으로 저렴하더라도 알맹이를 빼놓는 것이어서 거들떠보지 않으려 할 만큼 이곳은 핵심적인 명소였다.
누구는 성당 내부를 둘러보며 오랜 세월에서 묻어나는 무게와 더불어 범접하기 힘든 위엄을 느꼈다 하고, 혹자는 소피아 성당을 본 것만으로도 터키여행의 의미가 충분하다고 했다. 그런 곳을 하나하나 뜻을 되새기며 여유 있게 찬찬히 감상하지 못하고 시간에 쫓기고 뒷사람들에 밀려 서둘러 나와야 했던 아쉬움은 크다. 세계 각처에서 몰려들어 넓은 홀 안 여기저기 무리 지어 안내자의 설명을 경청하는 사람들과 그 머리 위로 비둘기 몇 마리가 무심히 옮겨 다니는 것을 보며 밖으로 나오자 환한 햇살에 눈이 부시다. 한창인 봄을 맞아 이 나라꽃 튤립을 비롯한 각종 꽃이 여기저기 싱그럽게 피어있어 더욱 화사한 한낮이었다.
히포드럼 광장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는 소피아 성당에 버금가는 건축물, 술탄 아흐메드 사원이 있다. 내부는 온통 푸른 타일(약 2만 1천 개)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부르기 편하게 ‘블루 모스크’라고 한단다. 이 건물은 오스만 황제 아흐메드 1세가 성 소피아 성당을 능가하는 건축물을 지으려는 야심을 갖고 축조한 것으로 건축적인 아름다움은 성 소피아 성당을 능가한다는 평가다. 다만 소피아 성당은 이보다 천여 년 전의 인지(人智)와 기술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소피아 성당이 대체로 어둡고 묵직하다면 블루 모스크는 밝고 경쾌한 편이다. 블루 모스크에는 이슬람 사원을 상징하며 1개로 시작해서 규모에 따라 그 수가 늘어난다는 첨탑이 6개 있는데 6개짜리는 세계 유일하게 많은 것이라 한다.
소피아 성당과 술탄 아흐메드 사원을 양 날개처럼 거느리고 있는 듯한 히포드럼 광장은 200년경, 10만 명 이상의 사람을 수용하는 대형 이륜마차 경기장이었다는데 그 흔적으로 미뤄 생각할만한 것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영화 『벤허』에서의 박진감 넘치는 마차경주와 꽉 들어차 흥분하던 관중들 장면을 떠올려 1천8백여 년 전의 상황을 머릿속으로나 그려볼 뿐이다. 한편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이집트에서 가져왔다는 오벨리스크, 뱀 세 마리가 뒤엉킨 형상의 사문석 기둥, 오르메타쉬라는 기둥이 나란히 있는데 이들은 경기장 시절에도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히포드럼에서 걸어가는 거리에 예레바탄 사라이라는 비잔틴 시대에 저수탱크로 썼다는 지하궁전이 있다. 유독 관람객이 많이 몰리는 곳은 궁전을 지탱하고 있는 336개의 기둥 중 메두사의 머리를 밑받침으로 한 기둥 주변이었다. 하나는 옆으로, 또 다른 하나는 거꾸로 큰 원주 기둥에 짓눌려 고통을 참는 퉁퉁한 얼굴 모습인데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또 사진에 담기 위하여 발길을 멈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으로 간 곳은 톱카프 사라이였다. 사라이란 여기 말로 궁전이란 뜻이다. 오스만 황제의 궁전이라는데 대제국의 궁전이 이렇게 소박할 수 있나 할 정도로 외관이나 내장이 검소하기 짝이 없다. 궁전 밖 어스름이 깃드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보고 한식당으로 가 45도짜리 독한 토속주 라크(Raki)를 곁들여 오랜만에 우리 음식을 들고 히포드럼 광장에 다시 모인 것은 이날 마지막 순서로 터키의 밤무대를 맛보기 위해서였다. 여흥으로 이것이 없으면 터키여행이 맥 빠지기라도 하듯 여행사들은 벨리댄스 관람을 일정 중에 꼭 넣고 홍보 효과를 노리는 듯하다. 노독에 지쳐 눈길을 주다 깜빡 졸기를 반복하였지만 가린 듯 만 듯 속살이 비치는 듯한 옷 속에서 톡톡 튀는 듯 빠르게 흔들어대던 무희의 몸짓이 아직도 눈앞에 어른어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