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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 가까운 산(36)

by 김헌삼


은령(銀嶺)을 향하여



1월도 중순을 지나며 한겨울로 접어들면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동안 그리워하던 눈 많은 산을 찾을 기대감으로 가슴 설렌다. 그리고는, 겨울이 닥쳐와도 또 이렇게 깊어가고 있어도 눈 한번 흡족하게 볼 수 없는 암회색의 도심을 훌쩍 떠나 먼 옛날 어린 시절의 향수가 어리어있는 눈 고장으로 찾아 나서게 된다.

강설이 잦으며, 한 번 내리면 쉽사리 녹지 않고 계속하여 쌓이기만 하는 곳. 강원도 깊은 산골, 대관령 부근의 산들, 예컨대 오대산 계방산 능경봉 제왕산 선자령 등 적설량이 특별히 많기로 널리 알려진 산을 찾아, 깊숙이 간직해 뒀던 방풍복 스패츠 털모자 귀막이를 챙겨 길을 나서는 것이다.

영동지방에는 사흘 전부터 시작한 눈이 어젯밤까지도 계속 내려, 미시령의 223센티를 비롯하여 많은 지역에 1미터 이상 되게 쌓여 큰 피해가 있었으며 길이 막히는 등 많은 불편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러한 오늘 대관령휴게소 북쪽으로 이어진 선자령을 가기로 계획한 상황이다. 고대했던 설경의 파노라마를 만끽하리라 분별없이 좋아했으나, 어젯밤 늦게까지도 그치지 않았다는 보도를 접하고는 길이라도 막혀버리면 그동안 키워온 꿈이 무산될까 걱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침이 되어 대관령의 눈은 그치고 영동고속도로도 차량통행이 가능하여 계획대로 출발하기에 지장이 없겠다는 인솔관계자의 말이었다. 모처럼 마련한 기회에, 찾아가기 직전까지 때맞춰 선도 100퍼센트의 신설(新雪)이 흠뻑 내려줬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꿈만 같았다. 특별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예정보다 십 여분 늦게 동대문을 출발하여 이천을 지나고 여주에 이를 때까지도 삭막하고 황량한 대지의 연속이어서 그동안 대서특필되었던 대설주의보 사실조차 의심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강원도 땅으로 들어서고 원주를 지나며 희끗희끗 눈 덮인 산야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산뜻한 은세계가 점점 확실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넓지 않은 땅덩이에서 서울 경기 일원에는 단 한 조각의 눈도 볼 수 없었는데, 바로 이웃한 강원지역에만 그렇게 많은 눈이 쌓였다는 것은 천지신명의 오묘한 조화로 돌려야 할 것이다. 영동 산간지방으로 들어가면서 아직도 간간이 눈발이 휘날리고 있어 완전하게 그친 것은 아니었다. 깊숙이 들어감에 따라 햇살이 구름 사이로 차차 터져 나오며 설원(雪原)에 곱게 깔린 무수한 설편들. 그 미세한 결정(結晶)에 햇빛이 부딪쳐 사정없이 부서지는 빛의 조각들. 보석처럼 현란하다.

순백의 언덕이 펼쳐지는가 하면 곧 키 큰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숲으로 이어졌다. 눈 더미가 수북하게 얹혀 축축 늘어진 나뭇가지들은 알프스의 깊은 산속을 찾아드는 듯한 기분에 젖어들게 하는 것이었다. 며칠간 집중적으로 큰 눈이 내려 여기저기 길이 막혔다는 보도 때문인가. 고속도로에는 차량통행이 비교적 한산하다.

우리를 실은 버스는 눈길에 비록 서행할망정 막힘없이 물 흐르듯 움직이고 있다. 시종 쾌적한 기분으로 설경의 극치를 감상할 수 있었다. 하진부를 지나며 왼편으로 소나무들이 하얀 배경 속에 한두 그루 또는 두세 그루씩 절개를 지키듯 외로이 서 있다. 중국 진대(晉代)의 오언고풍(五言古風) 가운데 「동령수고송(冬嶺秀孤松)」이라는 시의(詩意)에 합치하는 모습으로서 오랫동안 마음속으로나 품어보던 풍경이었다.

선자봉(仙子峰 1,157m) 산행의 시발점이 되는 대관령휴게소 건물은 쌓인 것과 치워놓은 눈 더미 속에 깊숙이 묻혀있어서 동화 속의 집처럼 보인다. 눈 내린 직후의 파랗게 갠 하늘, 더 바랄 것 없는 좋은 날씨다.

항공무선표지소가 있는 언덕까지는 외길이나마 통행할 수 있도록 뚫려있었다. 이 길 위에 물결치듯 늘어선 일행들이 하얗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옥양목 위에 원색으로 수놓아진 꽃들처럼 선연하다. 눈구덩이 속에서 악착같이 짖어대는 무선소 소속 경비견들을 뒤로하고 선두 젊은 리더 그룹이 번갈아 가며 러셀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양손에 쥔 피켈이 마치 쌍 도끼인 양 힘차게 휘두르기도 하고 몸을 던지는 투혼으로 허리 위까지 차오르는 눈을 쉴 새 없이 다져 나갔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엄청난 눈으로 꽉 막혀있던 길은 조금씩 뚫렸다. 그럴 때마다 몽매한 백성 같은 우리는 그 길을 찔끔찔끔 따르는 것이었다. 워낙 쌓인 눈이 깊어 러셀 속도는 대단히 더뎠다. 그래서 우리는 다져진 길이가 꽤 모일 때까지 발을 구르며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다가가기도 했다.

길목에 따라서는 얼굴을 바로 할 수 없을 만큼 눈가루를 흩뿌리며 강풍이 몰아쳐 웅크리고 서 있기도 버거웠다. 그 모습은 마치 시베리아 허허벌판 외딴 수용소에 급식을 기다리고 있는 군상들만큼 초라해 보였다. 날린 눈이 새파랗게 젊은이 검은 머리카락 위에 허옇게 얹혀 초로의 노인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이동이 점점 둔해지고 제자리에 서 있다시피 하니까 우리는 잦아드는 한기를 극복하려고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힘들여 러셀 치는 젊은이들이 당당해 보이고 추위는커녕 땀을 훔쳐내기에 바쁜 모습들이 오히려 부럽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간혹 뒤편에 서 있던 몇몇 젊은이들이 지원군을 자청하여 앞질러 나아가기도 하였다.

대열 속에서는 기다리는 시간이 늘어나며 몸속 깊이 파고드는 냉기와 함께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몰아치는 눈바람에 정신이 아뜩해짐을 참지 못하고 웅성거리며 반란 같은 동요가 일기 시작하였다. 그만 돌아가자는 소리도 심심찮게 있었으나 내 마음은 선뜻 이에 동조하려 들지 않는다. 지금까지 걸린 시간과 앞에 한결같이 쌓여있는 눈의 심도를 가늠할 때 처음 계획대로는 절대로 불가능하기는 해도 도중 하차하듯이 후퇴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앞쪽에 보이는 작은 봉우리라도 다녀오는 수정목표를 세워 그것이라도 달성해야 직성이 풀릴 것이었다. 나와 몇 명은 돌아서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로 전진하는 몸짓을 보이며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목전의 봉우리까지만 간다 해도 처음 계획의 몇십 분의 일도 못 되는 짧은 거리에 불과하다. 어쨌든 그 봉의 정상이며 전망이 틘 곳이어서 등성이를 오르다 말고 돌아서는 패잔병의 모습보다는 여기라도 올라 성취감을 맛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버스 몇 대에 나눠 타고 와서 처음에 끝없이 이어졌던 행렬, 이제 대부분이 되돌아가고 결국 이 작은 봉우리에라도 올라 기세 좋게 ‘야호!’의 함성을 함께 지른 사람은 불과 열댓 명이었다. 이렇게 해서 오늘의 산행 거리는 아마도 전무후무하게 가장 짧은 것일 듯싶으나 깊게, 아니 높이 쌓인 눈을 다지며 한 산행, 허리 이상 차는 대설 속에서의 산행을 처음 경험했다는데 큰 의미를 두고 싶다. 계획된 코스를 다하지 못한 아쉬움이 결코 작은 것은 아니지만 눈 세계에서 온몸 뼛속까지 속속들이 깨끗이 닦아낸 것 같은 상쾌한 기분은 오래도록 남아 생활의 활력소가 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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