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상품과 상인들
터키는 쇼핑객의 천국이다. 터키에서는 현란한 제품에서부터 소박한 제품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쇼핑을 경험해 볼 수 있다. 터키의 가게 점원들은 친절하고 민첩하다. 터키에서의 쇼핑에 관해서 씌어있는 무성한 글들이다.
우리는 터키에서 관광을 여는 첫날 오후 늦게 카팔르 차르시라는 대단위 공동시장(Grand Bazzar)에 안내되었다. 건물 정문 위 중앙에 ‘KAPALI CARSI’라는 돋을새김의 큰 글씨가 있고 그 옆에 조그맣게 역시 양각(陽刻)으로 부기된 1461이란 숫자가 있다. 이는 비잔틴제국(284~1453) 시절부터 형성되어있던 시장을 오스만제국의 메흐메드 2세가 크게 확장한 연도를 표시한 것이다. 그 후에도 시장 규모는 날로 커져 지금은 3만 7백 평방미터의 면적에 4천 개에 이르는 소단위 상점이 들어차 있다. 보석, 카펫, 구리제품, 가죽 가공품, 수공예품, 의류 등 모든 종류의 상품이 거래되고 있는 옥내 재래시장으로서 이스탄불을 찾는 관광객에게는 으레 한번은 들르는 명소가 되었다.
오스만제국의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이곳은 오랫동안 실크로드 등을 통하여 들어온 동서양문물을 교환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시장 내에는 모두 27개의 문이 있어서 밤이 되어 잠그면 시내와는 완전히 차단된다고 한다. 시장 내에는 가로세로로 통로가 무수히 많고 관광객이 끊임없이 밀려들어 북적이기 때문에 이탈되었을 경우, 찾는 데 애를 먹을 수 있으므로 정신을 바짝 차리라고 한다.
이곳에 들어가기에 앞서 여행사 관계자는 수많은 길이 얽혀있으니 잃지 않도록 조심하라 당부했다. 백을 단단히 간수하고 돈이 많은 듯한 인상을 보이지 말라 등의 주의사항을 몇 번이고 반복하고 강조하는 것이었다. 마치 순한 양들을 악마의 소굴로 들여보낼 때의 염려 어린 언질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 들어가기는 해도 한편 께름칙함을 털어낼 수가 없었다. 발을 들여놓자 상인들의 호객 소리와 손짓에 시달려야 했으며 앞뒤 좌우로 뚫린 길들 사이에서 어디로 향할지도 막연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특별히 찾아보고 사야겠다고 목표한 바가 없었기 때문에 서너 블록 들어가다가 좌측으로 틀어 방향을 잡아 돌아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는 바자르 입구 한편에 위치한 누루오스 마니예 사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편하게 다리 뻗고 늘어앉았다. 정여사가 1달러에 3개를 받아왔다는, 크고 싱싱한 오이를 나눠 먹으며 마른 목을 축였다. 빈번히 들고나는 사람들에 무심한 눈길을 주기도 했다. 이 사람 저 사람 행인들 앞으로 달려들며 껌 같은 소품(小品)들을 사달라는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가, 과연 한 건이라도 매상을 올릴지에 특별한 관심을 갖으며 남는 시간을 때웠다.
우리는 터키에 열흘 남짓 머무르는 동안 공식적으로 쇼핑의 편의를 위하여 가죽의류, 면제품, 터키석, 도자기 전문점과 잡화 기념품 등 다섯 군데의 상점에 안내되었다. 패키지여행에 있어 쇼핑 가이드에 대하여는 배후에 여러 가지 복잡한 부수적인 문제가 얽혀있다는 의혹들이 떠돌기도 한다. 그러나 현지 특산품들을 두루 돌아보고 가격과 가치를 비교하며 여행국의 산업과 경제 형편을 살피게 되는 계기로 삼기로 했다.
면화(綿花)는 터키의 주요 농작물 중 하나이며 가축으로는 양을 가장 많이 기르고 있으니 면제품이나 가죽가공품이 명품으로 부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터키석(turquoise)은 터키에서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예로부터 이웃 이란과 이집트에서 채굴된 이 보석이 이스탄불에서 많이 거래되어 터키에서 이를 처음 본 유럽 사람들이 13세기경부터 ‘터키의 돌(Turkey stone)’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여 본의 아니게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가게에 들어가면 단체에 대한 예우에서인지 으레 작은 호로병처럼 생긴 투명한 유리잔에 따뜻한 차[茶]를 내놓는다. 차로 제공되는 한잔의 애플티 속에 물건을 사고 싶은 마음이 샘솟게 하는 마약 성분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고객을 부드럽고 편안한 기분으로 이끄는 역할은 어느 정도 할 것이다. 터키 상인들은 상술이 능란하여 이들과는 흥정이 대단히 중요한데 그래서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같은 물건이라도 가격은 크게 차이가 난다고 한다.
처음 안내된 곳은 쉬린제에서 오찬으로 양갈비구이를 먹고 포만감이 가시기 전에 찾은 대단위 가죽의류 아웃렛이었다. 이곳은 별도의 상설 쇼룸(show room)을 갖추고 있어서 제품소개는 미끈한 남녀모델들의 패션쇼로 대신하였다. 어느 사이 막후교섭이 있었는지 우리 일행도 남녀 구색을 갖춰 모델로서 무대 위에 세우는 깜짝쇼를 곁들이기도 하였다. 물건을 산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즉석 모델도 끼어있었으니 그것도 상술이라면 상술이라 할만하다.
그 뒤로 파묵칼레에서 안탈야로 향하는 어딘가에서 면제품 가게를, 카파도키아 부근에서 대부분이 터키석인 보석류와 도기(陶器)들을 직접 만들어 파는 곳으로 각각 관광하는 기분으로 들르게 되었다. 터키석에 대한 설명은 아담한 터키 미녀의 유창한 한국말이었고 아바노스의 도기 아웃렛이랄까, 도요지에서는 10대부터 시작하여 7,80에 이른 지금까지 종사한다는 노련한 도공의 제작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우리 중 지원자에게 직접 만들어보는 체험의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였다.
기술 축적 없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 듯하다. 곁에서 장인(匠人)의 세심한 코치가 있었지만, 지원자의 손에 의하여 돌아가며 만들어지는 것은 도기 모양이라기보다는 점점 큼직한 남자의 성기 형태로 변하며 꿈틀거렸다. 당자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고 있는데 참관하는 우리는 유쾌한 웃음을 참지 못하는 해프닝이었다.
마지막 날 마지막으로 간 이스탄불의 잡화 기념품 가게는 교민이 터키인 점원을 두고 운영하는 곳이었다. 진열된 물건들은 올리브를 직접 또는 집어넣어 가공한 식제품(食製品)과 스카프와 간편한 면제 의류, 애플티를 비롯한 차 종류 등이 주류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눈길을 끄는 것은 여자화장품 크림 통 크기의 용기로 된 터키 비아그라였다. 나에게는 전혀 소용없는 것이어서 주의 깊게 보지 않아 내용물이 중요 부위에 바르는 크림인지 복용하여 신통력이 나타나는 알약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표 딱지에 그려진 그림이 웃음을 머금게 하는 것이었다. 아르테미스 신전 터에서 어떤 상인이 아르테미스 여신상과 함께 팔고 있던 소년의 대리석 모형은, 신화 속에서 거시기를 함부로 놀린 벌을 받아 빨래 방망이 만하게 커진 상태를 적나라하게 형상화한 것이었는데 그 모습을 거기에 그려 넣어 상표로 삼고 있었다.
우리 일행들이 좁은 가게 안에 퍼져 이것저것 둘러보고 있는 사이 중년을 갓 넘긴 듯한 동포 여자들 일단(一團)이 들이닥쳤다. 그중 한 여자가 스카프 몇 개를 뭉치로 들고 가격을 묻고는 아마도 반 정도로 후려 깎으려는 의도인데 잘 먹혀들지 않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러자 그 부인은 돋보기를 꺼내 쓰고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비장의 마지막 카드처럼 펴들고는 떠듬떠듬 “칸카르데쉬!”라고 말했다. 칸카르데쉬란 터키와 우리 사이를 말할 때 관용어처럼 쓰는 ‘피로 맺어진 형제’라는 뜻의 터키 말이다.
이 말 한마디로 흥정은 급격히 성사되고 당사자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수십 년 전 우리 남대문시장에서 물건값을 반으로 깎아 사고도 알고 보면 바가지 쓴 것을 알고는 씁쓰름했던 일들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