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내시빌로 가는 길
유나이티드 항공(UA)과 아메리칸 에어(AA). 이중 어느 항공사의 농간에 내가 놀아났는지 모르겠다. 어제 분명 UA는 취소된 자기네 항공권을 폐기하고 그 위에 AA편으로 바꾼 표를 만들어줬다. 그것을 가지고 나는 오늘 탑승 수속을 위하여 어디로 가야 하나를 확인할 의사로 AA의 셀프서비스 창구를 맡은 인자해 보이는 늙은이에게 물었을 뿐이다. 그는 그것을 보고 충청도 사람처럼 느린 속도로 컴퓨터를 두드려 보더니 무슨 이상을 발견했는지, 어딘가로 갔다 한참 만에 돌아온다.
돌아와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이 항공권은 잘못 발권된 것으로 쓸 수 없으니 UA에 가서 다시 받아 오라" 는 대답이다. 바보같이 착한(?)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돌고 돌아 꽤 멀리 떨어진 UA의 발권창구를 찾아간다. 그것이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처럼 10여 군데 열어놓고 일사불란하게 손님을 응대하는 게 아니고 「터미널 2」의 검색 출입구 옆 한 귀퉁이에 달랑 두 명의 직원이 처리하고 있으니 줄은 길고 또 여기서 만만찮게 시간을 잡아먹게 된다.
숙소에서 불과 10여 분만에 공항에 도착하여 탑승시간은 2시간 가까이 남아있었다. 그렇게 충분했던 시간이 이래저래 갉아 먹혀, 이제는 자칫 잘못하면 제대로 타기가 빠듯할 정도까지 몰려있다. 출발시간 30분 정도 남아있는 상태에서 내 차례가 온다. 아내는 좀 떨어진 의자에 맥없이 앉아 계속 조는지 눈을 감고 있다. 옆에 붙어 함께 있으면서 초조한 모습으로 불안해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싶다.
UA의 통통하고 까무잡잡한 여직원은 컴퓨터 검색을 하며 한참 어딘가와 전화 통화하더니 결론적으로 하는 말은 이 티켓이 하나도 잘못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누가 이 표를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냐. 그 이름이 무엇이냐? 내가 그의 이름을 알아둘 이유가 없어 특별히 외어둘 생각을 안 했었다.
그러면 무슨 창구였더냐? 남자냐, 여자냐? 흑인이냐, 백인이냐? 마치 잘못한 사람을 찾아내어 혼내주려는 것처럼 꼬치꼬치 묻는다. 그 사람이 고의든 아니든 잘못 판단하여 나를 이렇게 애먹이며 곤경에 처하게 했다면 나도 그에게 불이익 주기에 협조하고 싶다.
그의 이름이 무엇이었던가, 머릿속의 메모리 키를 더듬어본다. 깜박깜박하더니 물안개 위로 찌 솟아오르듯 떠오르는 게 있다. 데스크 앞에 「LOUD」라는 명찰이 있었던 것 같다. 라우드, 엘 오 유 디였던 것 같다고 여직원에게 고한다. 이놈의 늙은이 한 번 혼나봐라. 나이를 먹어 기능이 떨어졌으면 집에서 애나 볼 일이지. 애가 없으면 낮잠이나 자던지.
여직원이 다시 묻는다. 1시 반에 UA가 있는데 그걸 탈 것이냐, 원안대로 AA로 갈 것이냐. 시간도 촉박하지만, AA를 타줄 마음이 싹 가신다. 문제로 떠오르는 것은 우리 손을 떠나 있는 짐들인데 그것은 이미 내시빌에 가 있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짐작한 바지만 한번 더 확인해보는 것이다. 노인들이 귀찮을 정도로 왜 그렇게 자주 묻는가 이해된다. 자신 없으니 확실히 하기 위한 보신책이다.
이렇게 해서 내시빌 행은 또 1시간 반 지연되었다. 기다리고 있는 딸에게도 알려줘야 한다. 공중전화를 찾아가는 수고도 덜 겸 전화비도 절약할 겸, 확실히 하고 싶다는 명분으로 딸아이에게 직접 통화를 부탁한다. 그리고 바꿔달라 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탑승게이트를 찾아가며 우리 몸은 다시 한번 검색봉 목욕을 구석구석 당했다. 수백 명 정원의 빌딩 같은 시카고행 KAL에서 10분의 1 정도로 축소된 40여 석 규모의 로컬라인 UA를 타니 오두막에 들어선 기분이다. 키가 좀 큰 미국인은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자리를 찾아간다. 나이 들어 보이는 스튜어디스 하나가 북 치고 장구 치듯 모든 서비스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3시경 도착 예정이라니 1시간반의 비행거리이나 실제 하늘에 떠있는 시간은 1시간이 채 안 되고 나머지는 활주로에서 이륙 차례 기다리기에 소모되었다.
어제와 달리 쾌청한 날씨에 한번도 심한 요동 없이 내시빌의 조용하고 아담한 공항에 도착했고 오랜만에 만나는 딸을 보고 얼싸안았다. 하루 먼저 도착한 아들도 떨어져서 싱글싱글 웃고 있다.
짐은 따로 모아놓은 곳에 가서 찾는다. 이들도 주인과 오래 떨어져 있는 동안 설움을 많이 받은 듯 박스 짐 하나는 심하게 터졌고, 작은 딸네가 빌려준 수트케이스는 한 귀퉁이가 아깝게도 깨져있었다. 이렇게 해서 한 식구가 미국에 옮겨와 살듯이 내시빌에 모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