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산 가까운 산(46)

by 김헌삼


산간(山間)에서 맞는 바람



눈이 내리고 얼어붙어 한기가 옷 속을 파고드는 겨울이었다. 북한산 보국문에서 대성암 쪽으로 향하는 길은 하얀 눈길이었으며 사람들의 발길은 뜸하고 응달이어서 눈은 제법 쌓여있었다. 게다가 삭풍은 나무 끝을 흔들며 다가와 귓바퀴를 때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성긴 나뭇가지 사이를 빠져나가며 살을 엘 듯 예리한 바람 소리, 마른 잎들이 바람을 맞아 부르르 추위에 떠는 듯한 소리, 산등성에 우람하게 서 있는 키 큰 나무들을 통째로 뒤흔드는 듯 우레 같은 소리. 바람은 지나가는 속도와 세기에 따라 고저장단이 있으며 이들이 하나로 뒤섞여 내는 소리는 그런대로 화음을 이루어 오케스트라와 같은 느낌이다.

바람도 바람만이 다니는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오서산을 오를 때였다. 산자락 아래쪽에는 젊은 소나무들이 건강한 푸르름을 내뿜고 있었고 중턱 위로는 자잘한 잡목들만 앙상한데 칼날 같은 큰소리로 불어 닥치는 북풍에 납작 엎드린 모습이었다. 물결처럼 지나가는 소리의 위세만으로는 몸이 당장 휘둘려 어디인가로 내팽개쳐질 것 같았다. 그것은 다른 골짜기에서의 일인 듯 소리만 위세 등등하고 우리가 타고 오르는 골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어 오히려 아늑한 느낌마저 들었다.

세차게 불던 바람은 어느덧 먼 곳으로 쫓겨 가는 함성인 양, 능선 북쪽에 아득한 여운으로 남아 있고 우리가 치고 올라가는 산자락은 줄곧 고요하기 짝이 없다. 이때 이 시각 바람의 길은 다행스럽게도 다른 방향이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오서산의 북풍은 요행으로 오름길에서 면할 수 있었지만, 소백산의 칼바람과는 정면대응이 불가피한 것이었다. 비로봉 정상에 서 보기 위하여 노도와 같이 달려와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초토화할 기세로 밀어붙이고 지나가는 질풍. 내 안의 모든 힘과 인내를 모아 맞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바람은 어떠한 작은 빈틈도 예외를 주지 않고 뚫고 들어와 송곳처럼 콕콕 쑤셔대는 듯했다. 그래도 불굴의 정신력으로 정점을 찍고 짧은 시간이라도 지탱하다 내려왔기 때문에 우리는 그때 그 순간을 두고두고 떠올려보고는 한다.

겨울 산에서는 미약한 바람도 만나고 싶지 않은 ‘북풍한설’의 느낌이지만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의 산행에서는 한 점의 바람도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 주는 ‘시원한 바람’이자 ‘고마운 바람’이다.

생소한 이름의 하설산을 향해 떠날 때는 한여름, 그러나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는 때였다. 염려했던 비가 그만한 것은 다행이었으나 대신 무더위에 후덥지근함이 절정이었다. 게다가 댓바람부터 수직이나 다름없이 급한 경사 길을 올라야 하니 일행은 하나같이 전신이 땀으로 범벅되어 체면 불고하고 신음을 토해냈다. 나뭇잎 하나 까딱하지 않는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절실한 것은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시원한 바람이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아마 1천쯤 되는 고지였을 것이다. 키가 껑충 커진 나무들, 그래서 더 의젓해 보이는 떡갈나무들이 꽉 들어선 노추산에 가을은 깊어 있고 물든 잎들은 이제는 떨어질 채비를 끝내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따금 불어 닥치는 바람이 휘파람 소리를 길게 뽑으며 휘익 지나가면 그때마다 나뭇잎들은 서걱서걱 소리와 함께 떼 지어 내려앉는 비둘기들의 날갯짓처럼 난무하며 떨어져 쌓이고 있었다. 그것은 세찬 바람결을 타고 온통 하늘에 폭죽처럼 흩어졌다 뒤덮는 낙하여서 비록 일과성일지언정 바라보는 마음에 진한 감동을 안겼다.

바람은 기압의 변화로 일어나는 대기의 흐름이다. 즉 그 장소에 기압 차가 생기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하며 나타나는 현상이다. 기압 차의 정도에 따라 풍력과 풍속이 가늠된다.

어떤 대상과 부딪치느냐에 따라 각각 다른 소리로 정체를 드러낸다. 나무로 말하면 잔가지와 굵은 줄기, 연하고 싱싱한 새 푸른 잎과 깡말라 바스락거리는 잎사귀, 성긴 숲과 빽빽한 임간(林間) 등은 각기 다른 음색으로 소리를 내는 악기와 흡사하다.

봄바람은 있는 듯 조는 듯 꽃향기를 은근히 흩트리고 어루만져주는 보드라운 느낌이고, 여름의 바람이 간절히 바라는 고마운 것이라 한다면, 가을에 부는 소슬바람은 나뭇잎을 흔들어 서걱서걱 소리를 내고 흩날림을 보여주는 시청각의 바람이다. 겨울바람은 맞고 싶지 않으나 고난을 무릅쓰고, 극복해야 할 운명의 바람이다. 그래서 오히려 기억에 오래 남는 추억의 바람인지도 모른다. 산에서 맞는 바람은 이렇게 사계절 다 다른 느낌과 기세로 다가온다.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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