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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안유 Aug 16. 2021

우리 서로, 이야기 들어주는 나무

소소한 일상도

내 딸 라운이너와 함께라면  

     

내 딸 라운은 다크서클이 드리운 날이 더 많다. 하루 24시간을 어찌나 알뜰히 쪼개서 쓰는지 요즘 말하는 시테크(時 tech)가 이런 건가 싶기도 하고 또 청년의 삶이 고달파 보여 안쓰럽다. 라운은 하루에 여섯 시간 이상 자 본 적이 없는 거 같다. 틈틈이 번역 아르바이트는 물론이고 사회적 기업 운영에도 적극적이다. 각종 대외활동과 회의 등 동분서주하며 제 일에 몰두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날이 설 때가 많아 제발 좀 일 좀 줄이라고 하지만 말을 듣지 않는다. 한 번은 라운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치열하게 사느냐고. 거창한 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엄마랑 맛있는 거 먹고 싶어서 그래”라고 해서 웃음이 빵 터졌다. 



라운 성격은 한마디로 외유내강(外柔內剛)이다. 사람을 대할 때는 참 부드러운데 스스로에 너무 강하다. 마냥 풀어져도 좋을 이십 대인데 마치 수도자처럼 담금질하는 걸 보면 대견하면서도 마음이 참 아프다. 라운은 초등학교 때 유학을 떠났다. 한인교포가 운영하는 하숙집에서 학교에 다녔는데 먹는 것도 부실하고 등하교 차편도 열악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한창 키가 클 나이에 잘 먹지 못해 키가 작은 편이다. 그때는 그런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내가 미안해하면 나폴레옹은 하늘에서부터 재면 더 크다고 깔깔깔 웃으며 자신감을 내보인다. 어려운 환경을 잘 극복하는 힘이 생겼다고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학업을 모두 마치고 한국에 완전히 돌아와서야 옛이야기를 꺼냈다. “외국에서 학교 다닐 때 친구 엄마들이 좋은 차를 갖고 친구들을 데리러 왔을 때도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나는 나니까”라고. 


사진 : 라운이의 밥상

라운은 자기한테는 참 야박하다. 만원 넘는 옷은 안 사 입다가 근래 들어서 10만 원 가까이 되는 옷도 통 크게(?) 사 입기 시작했다. 이제 자기 벌이가 10만 원짜리 옷 사 입을 정도 능력은 된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한다.. 그런 라운이 요즘 맛집 탐색에 열중이다. 음식이 유별나게 맛이 있거나, 혹은 분위기가 감동할 만큼 좋은 집, 미슐랭이 뽑은 곳 등을 찾아 놨다가 굳이 나를 데리고 간다. 그런데 매번 다 좋지만은 않다. 힘들게 번 돈이라 아깝기도 하지만 딸의 애정 담긴 잔소리를 경청해야 하기 때문이다. 음식 종류에 따라 이런저런 예절을 알아야 하고 재료는 무엇이고 맛의 품평도 듣고 인증샷도 필수다. 밖에 나가서 먹지 않을 때는 종종 요리를 만들기도 한다. 뭐든 제대로 정석대로 진행해야 직성이 풀리는 라운을 보고 있자면 차라리 내가 하고 말겠다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식탁에 음식 접시가 올려질 때까지 갖가지 우여곡절이 이어지지만 라운이 만든 음식은 예술이다. 한참 엄마의 돌봄을 받아야 할 때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딸은 아무리 바빠도 짬을 내어 나와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다정한 베스트 프렌드다.  

   

양평 두물머리 수수 카페 


주말을 이용해 베프와 짧고 소박한 여행을 다녀왔다. 목적지는 양평 두물머리 <수수 카페>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양수역에서 양수철교 방면으로 도보로 15분쯤 가면 나온다고 하는데 우리는 차를 갖고 갔다. 차창 밖 여름 풍경 사이로 지나가는 전철이 정겨워서 나중에 전철 타고 한번 와봐야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양평 수수 카페는 안에서 보나 밖에서 보나 북한강 뷰가 예술이다. 갤러리 카페를 지향하는 곳이라 실내 공간이 예술적이다. 상상력을 끌어내는 미술 작품과 아기자기한 소품이 알맞은 자리에서 손님을 맞는다. 어디에 카메라 앵글을 대든 수준급 사진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카페다.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연신 사진 찍었다. 사진을 찍는 시간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내가 지금 두물머리 수수 카페에 있기에 가능한 순간이 영원으로 남는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내가 찍은 사진은 이를테면 ‘라운과 함께한 시간의 내용 증명’인 셈이다.      

사진 홍안유 : 수수카페 외경

양평 두물머리 수수 카페에서 강 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마음 토닥 길>이 있다. 이 길을 걸으면 바람이, 물결이, 풀잎이, 그리고 그리운 누군가가 지친 마음을 토닥토닥 달래줄 거 같다. <마음 토닥 길>이라니, 참 이름 예쁘게 잘 지었다. 이 길이 두물머리 수수 카페 소유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누구 소유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소중한 누군가와 여기에 있다는 게 중요하다. 우리는 소중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집이 아닌 곳에서 대화는 이상하게 진솔해지고 깊어진다. 먹고 입고 자는 일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어떤 사람이 되어갈 건지 미래의 이야기에 좀 더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 여행을 ‘삶의 방식을 바꾸는 계기’라고도 하는 것 같다. 


이야기 들어주는 나무  

    

사진 홍안유 : 이야기 들어주는 나무


양평 두물머리 수수 카페에서 가장 핫한 공간은 ‘이야기 들어주는 나무’ 아래다. 이야기뿐 아니라 그 어떤 소원도 다 들어줄 거 같은 품이 넉넉한 나무 아래 라운과 자리를 잡고 앉았다. 라운은 갖가지 사연을 꺼내 오빠 흉도 보았다가 좋다고 했다가 수다를 떨었다. 나도 맞장구를 치며 후련하게 내 안에 갇혀 있는 사연을 쏟아냈다. 우리 서로가 이야기를 나누면 나무가 귀 기울여 듣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우리 둘은 무대 위의 명배우? 문득 의미 있는 멋진 말을 하고 싶었다. 라운이 닭살 돋는다고 흉을 볼 것 같아 속으로 읊조렸다. 내가 좋아하는 나태주 시인의 <너를 두고>라는 시를. 


너를 두고  - 나태주- 


세상에 와서 

내가 하는 말 가운데서  

가장 고운 말을  

너에게 들려주고 싶다 


세상에 와서 

내가 가진 생각 가운데서 

가장 예쁜 생각을  

너에게 주고 싶다 


세상에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표정 가운데 

가장 좋은 표정을 

너에게 보이고 싶다 


이것이 내가 너를  

사랑하는 진정한 이유 

나 스스로 네 앞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이다




양평 두물머리 수수 카페 ‘이야기 들어주는 나무’ 아래서 새삼 깨달았다. 사랑이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때로는 마주 보고 웃고, 때로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삶의 목표를 정하고 실행하며 우리 서로 이야기 들어주는 나무로 살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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