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는 꿈을 꾸는 사람이 아니다.
매일 기상천외한 꿈울 꾸는 나와 달리 베니는 우리가 함께한 지난 6년 동안 꿈을 서너 번 꾸었던 것 같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습관처럼 나는 베니에게 한국말로 묻는다.
"베니, 잘 잤어? 꿈꿨어?"
몇 년째 한국어 왕초급 단계에서 영 진전하지 못하는 베니는 이 문장은 잘 알아듣고 한국어로 대답한다.
"잘 잤어요. 꿈꿨어... 요-아니."
밤사이 머리에 까치집을 바지런히 지은 베니가, 잠결에도 존댓말로 대답하는 모습이 내 눈에는 너무 귀엽다.
어떤 때는 잠에서 덜 깨어,
"잘 잤어요. 꿈..? 꿨어.."
라고 한국어로 대답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놀라서 묻는다.
"꿈꿨어? 무슨 꿈 꿈꿨어?"
그러면 베니는 그제야 자신이 잘못 대답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독일어로 답한다.
"꿈? 아- 아니. 꿈 안 꿨어."
매번 전쟁터에 나가듯이 주먹을 꽉 쥐고 전쟁, 지진, 사고 등 별별 이상한 꿈을 꾸는 나와 달리, 양 손바닥을 가슴과 배 사이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아가처럼 쌔근쌔근 자는 그가 신기하고 부럽다.
그는 이번 생이 처음인 창조물인 것이 분명하다.
그런 베니가 꿈을 꾸었다고 했다.
일주일 넘게 중환자실에 있다가, 상태가 호전되어 일반 병실로 옮긴 지 얼마 안 되었던 때였다. 극심한 통증으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던 베니는 그날 수술 후 처음으로 네 시간 정도 잠을 잤다고 했다. 눈동자를 움직이고, 우리말에 반응을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적 같은 차도를 보였다고 생각하던 그날, 베니는 자신이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던 어느 날 밤에 그 꿈을 꾸었다고 했다. 수술 후 성대 신경도 마비가 되어서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귓속말을 하듯 공기로 소리를 내며 겨우겨우 말을 이어 나갔다. 잊어버리기 전에 그 꿈을 꼭 적어서 기억하고 싶다면서.
꿈은 'Reset'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베니가 꿈속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다. 그런데 무언가 문제/결점이 생겨서 컴퓨터 게임이 멈추어버렸다. 베니는 멈춘 컴퓨터 게임을 어떻게든 다시 작동시켜 보려고 몇 시간 넘게 게임기를 붙잡고 씨름을 한다. 문제을 고치기 위해 이리보고 저리보고 하지만 해결되지 않는다. 베니는 알고 있다. 이 문제가 사실 '그렇게 심각한 결점'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베니는 그 결점을 '별 것 아니야' 하면서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다. 문제를 붙잡고 계속 시름을 하면서 베니는 "예수님, 나의 하나님." 하고 외친다. 그러던 중 갑자기 베니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오른다.
loslassen - 내려놓음
결국 베니는 이 문제를 내려놓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재시작 - Reset 버튼을 누른다.
게임기가 꺼졌다.
그리고 다시 켜졌다.
베니는 안정을 찾고 스르륵 잠에 들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났다.
베니 아버님은 볼펜을 들고 베니가 힘겹게 뱉어내는 단어와 문장들을 수첩에 빠르게 적어 내려가셨다. 수면 부족과 통증, 그리고 강력한 진통제로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 어딘가에 있는 듯한 얼굴을 한 베니는, 어떻게든 정신줄을 붙잡고 자신이 꾼 꿈을 과장과 오류가 한 치도 없이 본 것 그대로 말하려고 노력하는 듯 보였다.
베니의 꿈 이야기를 듣고 생각했다.
이 꿈 덕분에 베니가 지금 이렇게 견뎌내고 있는 것이구나.
꿈속에서 베니가 어떻게든 고치려 했던 그 결점은 바로 베니가 수술 후 맞닥치게 될 신경손상이 아니었을까. 베니는 이 결점을 내려놓고, 삶을 선택하기로 결정했구나.
고마웠다.
삶을 선택하기로 결정해 주어서.
평형감각 장애로 예전처럼 뛰고, 운동할 수는 없지만 베니는 이제 휠체어 없이 잘 걷는다. 성대 신경 마비로 목소리의 볼륨과 높낮음을 예전처럼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는 없지만, 재활 훈련으로 목소리도 되찾았다. 왼쪽 안면 마비로 눈이 잘 감기지 않아 눈물약을 들고 다녀야 하고, 밤에는 눈을 보호하는 안대를 착용해야 하지만, 재활 훈련 덕분에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던 현상도 사라졌다. 한쪽 귀는 들리지 않지만, 다른 한쪽 귀로 작은 목소리도 얼마나 잘 듣는지 놀랄 정도다.
얼마나 감사한가.
하지만 매일 아침 '그래- 감사해야지' 하고는, 매일 밤 '왜 너무나도 착한 베니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건가요?'라고 하늘을 향해 외치며 많이 울었다.
좀 더 호전되었으면 하는 마음. 더 완벽하게 낫기를 바라는 마음을 도저히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속상한 마음, 원망스러운 마음, 후회하는 마음을 쉽사리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주 어떠한 문제에 붙잡혀 내려놓지 못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가.
지나고 나면 그것 참 별 것 아니었다고 말하게 될 문제들. 시간과 함께 잊혀지게 될 문제들.
내려놓아보려 한다.
살아가는데 큰 문제가 없는 정도의 결점이다.
가까이 다가가 결점만 바라보고 있으면 그 결점 밖에 보이지 않지만,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보면 결점이 아닌 것들이 더 많이 보인다.
* 이 글은 주관적인 시각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의학적인 내용 등에 있어 사실과 다르게 알고 있거나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리고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