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캠퍼스의 계단은 늘 회색이었다. 비가 오면 색은 한 톤 더 가라앉았고, 맑은 날에는 햇빛이 콘크리트 틈에 얇게 고였다. 나는 그 계단을 오르내리며 법을 배우고, 행정을 배우고, 제도가 사람의 삶에 어떻게 스며드는지를 공부했다. 책장을 넘길수록 세상은 단순하지 않았고, 복잡함이 이상하게도 나를 안심시켰다. 사람보다 개념을 마주하고 있을 때, 나는 잠시 숨을 놓을 수 있었다.
강의실 안의 공기는 늘 일정했다. 교수님의 목소리는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속도로 흘렀고, 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잔잔하게 이어졌다. 형광등 아래에서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시험과 과제는 부담이었지만, 애쓴 만큼 결과가 돌아오는 구조는 예측할 수 있었다. 세계 안에서는 마음이 과하게 닳지 않았다.
실습을 나가기 전까지, 나는 꽤 단정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명찰을 처음 달던 날, 거울 속의 나는 생각보다 차분해 보였다. 처음 며칠은 괜찮았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고맙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묘한 뿌듯함도 느꼈다. 내가 배운 것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확신이 잠깐씩 스쳤다.
하지만 실습 현장은 금세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말보다 먼저 사람들의 표정이 시야를 채웠다. 전화벨은 쉬지 않고 울렸고, 복지관 문이 닫히는 소리는 하루의 리듬을 자주 끊어 놓았다. 질문은 끝나지 않았고, 이야기들은 늘 내가 예상한 시간보다 길었다. 누군가의 말을 끝까지 듣는 동안,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어느 날은 내 속이 이미 비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웃어야 했다. “괜찮아요.”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데에만 온 신경을 썼다. 표정을 유지하는 동안, 마음은 뒤에서 한 걸음씩 물러나고 있었다. 상대가 돌아선 뒤에야 얼굴의 힘을 풀 수 있었고, 짧은 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로 나는 웃는 연습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가 끝나면 책상 앞에 앉아 일지를 썼다. 오늘 만난 사람들의 말투와 표정을 문장으로 옮기다 보면 손목보다 마음이 먼저 뻐근해졌다. ‘느낀 점’이라는 칸 앞에서 펜을 쥔 손이 자주 멈췄다. 이 감정을 이렇게 적어도 되는지, 어디까지가 솔직함인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글자는 차분했지만, 그 사이사이에는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남아 있었다.
집에 돌아오면 신발을 벗은 채로 한동안 서 있었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를 멍하게 듣고,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면서도 생각은 멀리 가지 못했다. 피곤하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상태였다. 누군가 말을 걸면 대답하기가 어려웠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하루를 다 써버린 기분이 들었다.
어느 밤, 예전에 적어둔 강의 노트를 다시 펼쳐본 적이 있다. ‘사람을 중심에 두는 실천’이라는 문장이 형광펜 아래 남아 있었다.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다가, 조용히 노트를 덮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문장 속의 나는 지금의 나와 너무 달라 보였다. 그때 처음으로, 이상이 아니라 나 자신을 기준으로 다시 생각해도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어느 날 문득, 다른 실습생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생각했다. 저 사람들은 괜찮아 보이는데, 왜 나는 이렇게 버거울까. 이 정도가 힘들다면, 내가 부족한 사람은 아닐까. 그 생각은 오래 머물지 않았지만, 한 번 생긴 균열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점점 내 속도를 숨기며 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질문은 더 구체적으로 되었다. 이 일이 하루가 되고, 해가 되고, 삶이 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이력서에는 자격증과 학위가 차분히 적혔지만, 종이 위에서 나는 자주 멈춰 섰다. 자리는 많지 않았고, 이미 그 자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아주 많았다. 공고 속 문장들이 눈에 걸릴수록, 내 걸음은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어느 복지관에서 최종 면접을 본 날이 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누군가는 지금 이곳이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차근차근 쌓아가라는 말을 건넸다. 조언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었지만, 그 말은 쉽게 마음에 닿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가방을 내려놓았을 때, 방 안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정적 속에서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졸업 후의 시간은 이상하게도 재촉하지 않았다. 알람 없이 눈을 뜨는 오전이 이어졌고, 노트북을 켰다가 덮는 일이 반복되었다. 시간은 있었지만, 쓸 자리가 없는 느낌이었다. 불안은 방향을 잃은 채 방 안을 서성였다. 나는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자주 나 자신을 의심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다. 나는 누군가를 돕는 일을 가볍게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모든 마음을 한 번에 내어주며 버티는 방식이 나와 맞지 않았다는 것을. 같은 방향을 바라보더라도, 걷는 속도와 숨 고르는 법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음은 느렸지만, 분명했다.
지금도 불안은 가끔 문득 찾아온다. 그럴 때면 나는 손을 씻고, 창을 조금 연다. 차가운 물이 손끝을 지나가고, 바깥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든다. 더 내어주지 않겠다는 선택이 나를 지키는 일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오늘도 그렇게 하루를 건넌다. 그래서 나는 오늘의 나로, 그때의 나를 조용히 다독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