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에서 모래알 하나 없어졌다고 뭐 그리 대수일까
퇴사 중인데요, 퇴사하고 싶습니다.
지하철에서 내린 후 평소라면 버스를 탔을 어느 저녁, 집까지 3.5km 남짓한 거리를 오늘은 걸어가 보기로 했다.
화사 노트북과 충전기 덕에 평소보다 더 무거운 가방, 손목 인대를 다친 왼손이 슬슬 아파온다. 양손으로 번갈아 가며 들어도 허리가 뻐근해 오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래도 지금의 이 기분을 떨쳐 내려면 몸을 고생시키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버라이어티 한 인생 첫 퇴사
퇴직 절차를 밟았던 최근 몇 주는 유난히 더 퇴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방에서 재택근무 중인데 집에 가고 싶어 지는(?) 기분이랄까.
나는 7월 12일 새로운 회사에서 최종 면접 합격 연락을 받았다. 협상 단계 중 담당자가 2번이나 바뀌면서 조마조마한 시간을 보냈지만, 결국 9월 초 최종 오퍼를 받고 인수인계 절차를 시작했다.
2 달이라는 비교적 넉넉한 기간을 잡았음에도 인수인계는 마지막 3주 간 동안만 이루어졌고, 후임자가 50대 부장님인 탓에 진도가 몹시 느릴 수밖에 없었다.
부담감이 심했을뿐더러 인수인계 하면서 ‘왜?’라는 질문을 매일 100번씩 듣다 보니 스트레스가 극심해 원형 탈모가 올 정도였다. 매주 토요일에는 밀린 일을 쳐내기 위해 출근도 해야 했다.
I am 둘리에요…?
글을 쓰는 지금 이 시점에 나는 이미 퇴직을 마친 상태이다.
퇴직 당일까지 보고서 좀 써달라는 팀장, 회계 처리 하나만 해달라며 휴가 간 부장, 미팅 한 번만 나와달라는 후배, 퇴직한다고 전사에 메일 쓰고 다음 날인 토요일에 밤까지 일하는 정신 나간 나 자신까지.
이 모든 것이 호의와 책임감에서 비롯된 자발적인 행동이지만, 사실 (후임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고마워하지 않는다. 호이가 계속되면 둘리인 줄 안다고 하던가.
처음부터 무언가를 바라고 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 이쯤 되면 너무하다 싶긴 하다.
그렇지만 모래알에게는 그 해변이 너무 소중했다.
해변에서 사라진 그것이 모래알이든 돌덩어리든, 파도가 한두 번 치면 흔적조차 없어진다. 물론 누군가는 그 웅덩이에 걸려 넘어지고 다칠 수는 있지만, 대부분은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모래알은 스스로의 빈자리가 신경 쓰인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나 스스로도 나는 모래알에 지나지 않았다고 인정해 버리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고마워하지 않지만 후회 없이 모든 걸 불태운 나는 나 스스로가 자랑스럽고 대견하다. 결국 이 모든 게 자기만족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