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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우탱고 Nov 29. 2022

탱고 다이어리 1. 약속

 

 

 약속이 있다. 아마도 8시 즈음이면 끝날 것 같은 약속. 오늘은 그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정규 강습이 없는 공강이기에 더욱 그렇다.  몇 번의 급습적인 톡 알림이 스팸임이 확인될 때마다 실망하는 나. 아무 기대할 것도 없으면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바보 같은 시간이 나무의 송진처럼 흐르고 있었다.  


 약속 장소로 향한다. 제법 찬바람이 비교적 얇게 입고 다니는 내 옷을 화살처럼 가볍게 뚫고 지나간다.  순간 심장에 피가 화악 쏠리는 듯하더니 어지럽기까지 했다. 급하게 마스크를 착용하고 잠깐 길가 건물 입구로 들어가서 몸을 진정시킨다.


 가던 길을 멈추었지만 약속 장소는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있기에 마음이 불안하진 않았다. 몸을 조금씩 꼼지락거리니 온기가 좀 도는 듯했다. 이제는 계절에 바짝 순응하면서 살아야 하나보다.


  또 다른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약속시간이 10분 정도 남았고 조금 늦는다는 그녀의 급함을 담은 전화 목소리에 괜찮다고 답하며 안에 이미 들어와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적당히 시키라고 말하기에 그냥 메뉴판 보고 있을 테니 도착하면 같이 정하자 답하고 테이블 옆 창밖으로 보이는 오후 5시의 늦가을 초겨울 거리 풍경을 감상한다.


 창 밖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니 20여분 후 그녀의 차가 두리번거리며 눈 안으로 들어온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손짓으로 주차장을 알려주고 몇 걸음 앞서 입구로 안내했다. 차창을 내리며 그녀가 던지는 "선생님" 하는 목소리와 활짝 웃음이 오래되어도 익숙하다. 한동안 입지 않다가 어느 날 옷장을 열어 괜히 뒤적이다 발견하게 된 예전에는 무척이나 잘 입고 다녔던 옷을 다시 걸쳐보는 느낌. 낯선 듯 익숙한 듯한 느낌. 그 시절의 풍경과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지나는 그렇게 한번 들뜬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아 쓸데없이 많은 손짓과 몸짓으로 그녀에게 회답한다. 15년 만에 만난 그녀였다.


  시그니처라고 해서 시킨 스파게티와 스테이크를 나누어 먹고 와인 한잔으로 몇 번의 건배를 나누었다. 지난 시간 동안의 얘기들로 가득 찬 한 시간여를 보냈다. 그녀는 결혼 후 외국에서 쭈욱 살다가 일 년 전에 이혼하고 한국에 다시 온 것은 서너 달 전이라 했다. 한국에 돌아오기 전부터 선생님이 계속 생각났어요.라고 말하는 그녀. 적어도 내 눈에는 그 시절 24살의 그녀가 그대로 보였다. 탱고를 다시 하고 싶은 건 아닐까?라고 묻자 그것은 아니라며. 나중에 다시 시작할 수는 있지만 지금은 한국에서 자리를 잡는데 집중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체육학과를 전공한 그녀는 입시 관련 체육관을 만들고 운영할 계획을 말했다. 내가 여전히 싱글이고 여전히 탱고를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별 놀람 없이 왠지 그러실 것 같았다 했고 간혹 유튜브에서 영상을 보곤 했다고 한다.


 그럴 즈음 톡이 울렸고 오늘"엔간또" 밀롱가가 열리니 오세요.라는 내용을 그녀에게 보이고 혹시 같이 갈래? 하고 물으니 오늘은 선생님과 식사만 하고 다음에 갈 준비가 되었을 때 말씀드릴게요. 사실 탱고 어떻게 추는지 다 까먹었다며 강습부터 받을 예정이라고 한다. 단체는 시간이 어려울 것 같고 체육시설이 완성되며 개인 출강을 부탁드리고 싶은데 가능하냐고 묻길래 시간이 맞는다면 언제든 좋다고 답하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국에 올 때 조금 정리되면 선생님에께 연락을 드리고 인사드리고 싶었어요" 정말 그 이유가 다 인 듯했다.


 개관 때 초청하겠다는 그녀와 헤어진 후 나는 예정에 없었다가 갑자기 생긴 밀롱가 일정을 소화하기로 했다. 가는 길 내내 그녀가 활동했던 그 시간에 머물러 있다가 버스 정류장을 놓칠 뻔했다. 기사님에게 급히 양해를 구해서 출발하려는 버스 문을 열고서 내려 밀롱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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