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한 것 맞다. 이제 곧 올라가야 하는데, 그래도 니가 부산에 있으니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저녁이나 추천해 줘, "
"내가 메뉴 자판기냐? 실없긴."
친구는 부산에 왔는데 만날 시간이 없으니 그저 목소리라도 들으려 전화했으리
그나저나 부산에서 메뉴 추천이라 하면. 기본 메뉴는 딱 정해져 있다.
국밥, 밀면, 낙곱새
유명한 식당에 따라 메뉴는 다양해지지만 굵직하게는 저게 정석이다.
난 친구에게 얼큰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산의 소울. 겨울의 전통 강자. 뜨끈한 국밥에 으잉, 한 그릇 하면 으잉. 든든하다 아이가"
맞다. 겨울에는 속 따땃한 국밥이 최고다.
집에 먹을 것도 없었는데, 나도 덕분에 메뉴가 정해졌으니, 이왕 생각난 김에 해운대 최고 국밥집을 소개해주겠다.(당연히 내 기준)
같이 가자. 뭐하노 퍼뜩 온나
난 그렇게 동네 앞집 국밥을 뒤로하고, 굳이 반대방향으로 두 정거장이나 더 갔다. 주민이 에둘러가며 찾아가는 맛집. 그만큼 생각나고 끌리는 맛인 것인 게지
내가 이 집을 소개하는 이유는 일단 맛있다
그리고 해운대역에서 접근도 용이해서 해운대 지하철에서 내려 해운대 겨울 해수욕장 방향으로 쭉 걸어가다 보면 오른편에 있는 가게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밀양돼지국밥
현재는 눈 내린 다음날 월요일 해운대.
시간도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오후 5시인데, 큰 매장이 꽉 차 있다. 어름 잡아 손님만 40명이 넘는 것 같다. 내가 자리에 앉자 인원이 점점 몰려 웨이팅이 생기기 시작했으니 역시나 맛집. 알만한 사람은 안다는 것이겠지.
국밥 메뉴는 돼지국밥, 순대국밥, 섞어 국밥, 모둠국밥이 있다. 난 다 맛보고 싶어서 모둠국밥으로 주문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국밥집이란 것이 우리 모두에게 평등한 뜨거운 힘을 주기 때문일까.
내 옆에는 혼자 온 머리를 꼭 묶은 아가씨가 철로 된 공깃밥을 기차게 흔들고 있고, 앞에는 뿔테 낀 아저씨께서 한잔의 소주를 벗 삼아 뻘뻘 땀 흘리며 한입 드시고 계시고, 뒤쪽에는 아빠를 따라온 남자아이가 적당하게 식힌 수육을 입에 오물거리고 있고, 건너편에는 교복 입은 여학생 두 명이 수다반 밥반 재잘거리고 있다. 참 다채롭고 정겹구나. 이처럼 이 겨울 남녀노소가 즐거운 음식이 국밥 아니면 또 있겠는가
난 불현듯 궁금해졌다. 국밥에 해산물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제주도 흑돼지가 있는 것도 아닐진대
왜 부산에 돼지국밥이 유명한 걸까?
찾아본다. 돼지국밥이란 돼지 뼈로 우려낸 육수에 돼지고기 편육과 밥을 넣어 먹는 국밥류의 요리로, 부산, 밀양, 대구, 마산 등에서 만나볼 수 있는 경상도 지역의 향토음식이라고 한다.
(향토음식이었구나. 경상도가 고향이라 된장찌개나 김치찌개 느낌으로 생각했는데 그저 내게 더 익숙했나 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게 돼지국밥 집을 가면 맑은 국물의 국밥과 탁한 국물의 국밥으로 나뉘었는데 이게 지역적 특색이었다.
밀양의 돼지국밥은 소뼈로 육수를 내 국물 색이 맑고, 부산식 돼지국밥은 돼지의 뼈로 우려내기 때문에 색이 탁했던 것이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나는 그저 먹던 호탕한 걱정 없는 음식이라 생각했는데, 이게 복잡한 속사정을 가진 아이였다
부모님이 누군지 모른다.
밀양은 1938년 밀양의 무안 장터에서부터 시작되어 현재 백 년 역사를 내세워 원조라 주장하며,
부산은 또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경상도 지방으로 피난온 피난민들이 먹을 것이 부족하자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돼지뼈를 이용해 설렁탕을 만들어 먹은 데서 유래되었다고 말한다.
내 보기에는 밀양 국밥에는 우리네 전통이 있고, 부산 국밥은 우리네 시름과 애환이 있으니 둘 모두 훌륭한 서민의 음식 같다.
땅은 말이 없다. 단지 사람만 떠들 뿐.
우리는 그저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 밀양돼지국밥은 제대로 된 국밥이다. 이름은 밀양돼지국밥인데 해운대 맛집으로 소개되고, 상호만 건너온 것이 아니라 우윳빛 탁한 색의 온전한 부산식 돼지국밥이다. 이것저것 들어가 녹은 것이 천상 국밥이로구나
이제 한번 먹어보자
일단 때깔은 참 곱다. 우윳빛 진한 국물이 눈으로 봐도 깊은 맛이 우러나올 것만 같다.
뜨끈한 국물에 잘 닦인 수저를 넣는다.
김이 푹 오르며 안경을 덮는다. 에라 모르겠다.
난 안경도 한편에 벗어두고 입천장 까져라입 깊숙이 넣었다.
역시나 맛있다.
내가 이 집을 좋아하는 것은 깔끔해서다. 진하면 쉬이 냄새가 나기 쉬운데 이곳은 복지리 국처럼 맛이 깔끔해서 시원할 정도다. 무슨 마법인지 안에 있는 건더기 뭐 하나 노린내를 일부러 찾으려 해도 없다.
맛은 심심한 듯 깊은 감칠맛이다.
마치 해운애 앞바다에 깊이 가라앉아 있던 무거운 감칠맛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듯 찬찬히 느껴진다. 이 맛을 느끼면 이제 나처럼 멀리서도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감칠 나게 맛있는데 깔끔하다?
이건 마치 얼굴이 잘 생겨 만난 남자가 깔끔하기까지 한 느낌. 이게 뭐냐. 뭐긴 뭐냐 대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