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은 누구에게나 중요하지만 오랜 시간 일 때문에 쉬지 못한 사람에게는 더욱 각별함을 느끼게 한다. 만약 두 달 동안 일만 하다 하루의 시간이 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오늘이 그런 날이다. 정말 오랜 시간 노동이라는 격류에서 미친 듯이 노 젓기를 하다 마주친 외딴섬 같은 하루가 주어진 날. 집에는 이미 주문해놓은 음식이 가득하기에 맛집을 가는 것은 오히려 신경이 쓰일 것 같고, 심신은 지쳐 멀리 나갈 수가 없다. 그래서 지인과 나는 오랜 고민 끝에 해운대에 갈 수 있는 색다른 경험을 생각했다. 그랜드 조선 부산점 애프터눈 티 세트다.
그랜드 조선 부산점은 해운대 메인도로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만날 수 있다. 가장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근접해서 즐길 수 있는 곳이라 할 수 있으며 외부는 오랜 시간을 짐작할 수 있는 느낌이지만 안은 전체 330개의 객석을 가진 특급호텔이다.
깨끗한 남색 유니폼을 입은 직원의 인사를 받으며 유리로 된 1층 분 입구로 들어간다. 내부는 전체적으로는 화이트로 단정하고 절제된 분위기가 풍기는데 로비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감성 조명이 있다. 포토존이라고 적혀 있는데 호텔에 자주 오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은 이런 날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와서 사진을 남기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포토존을 감상하고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이런 곳이 상류층의 여가 공간이구나 싶은 마음이 든다. 초록 꽃무늬가 있는 라운드 의자가 편안해 보이며 제일 안쪽에는 검은 피아노가 있다.
나는 예약을 해서 바다가 보이는 창가 자리를 받았는데 주말이 아니라 평일을 이용했으며, 평일은 오후 12시부터 5시까지 이용가능하다. 주말에는 제한 시간이 있지만 평일에 가면 그런 제한이 없어서 책을 보거나 오랫동안 밀린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창가로 앉아보니 역시나 해운대 해수욕장이 눈에 들어와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애프터눈 티의 기원은 역시나 19세기 영국 귀족사회에서 시작된 생활문화인데 원래는 점심과 저녁 사이인 오후 3~5시경에 먹는 것이었다. 당시 영국은 아침과 저녁 두 끼만 먹어서 배고픈 공복시간에 사교모임으로 활용했던 것으로 샌드위치, 스콘, 마카롱을 티타임에 같이 곁들여서 즐겼다.
호텔 자리에 앉아있으니 직원이 금방 친절하게 메뉴판을 가져다주며 설명을 해줬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애프터눈 티세트이고요. 여기에서 시향 하셔서 2잔을 골라주시면 됩니다."
기분 좋은 응대를 받으니 이제야 향수병처럼 생긴 저 작은 병들의 용도를 알 수 있었다. 차례로 냄새를 모두 맡아봤어 보니 다 각각의 풍미가 있어서 무엇을 골라야 한다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도 나는 달큼한 향기가 이름처럼 잘 어울리는 몰디브를 주문했다.
기다리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니 젊은 친구 3명이서 대학생활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고, 중년의 부부가 도란도란 대화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난 이런 곳에서 이 시간에 차만 마시러 들어오는 곳은 처음이었지만 한 번씩 이런 자리에 와서 쉬는 것도 참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분위기가 좋아서 기분도 거기에 감응하듯 즐거워진다.
티와 3단 트레이는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나오는데 테이블 위에 작은 모래시계가 3개 있는 게 귀여웠다. 직원은 내가 궁금해하던 것을 아셨는지 먼저 모래시계를 설명해 주었다.
"여기 파란색 모래가 떨어지면 마시면 됩니다. 색이 다른 모래들은 차에 따라 마시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고요. 몰디브는 엽차 종류이기 때문에 파란색 모래시계를 기준으로 하는 겁니다."
이쁘다. 정말 삼단 트레이에 따끈한 스콘들과 촉촉한 샌드위치와 달콤한 케이크가 올라가자 어릴 적 동화책에서 보던 파티장에 초대받은 기분이다. 사실 내 입장에서도 매일 가벼운 마음으로 갈 정도의 가격대는 아니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해외로 여행도 가는데 이 정도 소비로 이런 경험은 오히려 합리적이라는생각이 들 정도다
나는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라는 책을 읽으려고 가지고 왔는데 <위대한 개츠비>를 들고 왔으면 책 맛이 더 났을 것 같아 아쉬웠다. 다음에는 저 책을 들고 한 번 더 와야겠다.
맛을 평가해 보자면, 시향까지 하고 주문한 것이니 차야 당연히 만족했으며 제일 아랫 단에 있는 녹차스콘이 짙은 녹차향이 씹을 때마다 올라와 기분 좋은 맛이 났다. 특히 계란빵처럼 생긴 버섯 콩피 키슈로렌이란 빵이 있었는데 따뜻한 것이 계란의 부드러움 속에 쫄깃한 버섯들이 씹혀서 식감이 좋았고 빵이라기보다 하나의 음식같이 느껴졌다. 나머지 빵들도 다 맛있었는데 특히 스콘을 먹을 때 나오는 딸기잼이 있는데 어떤 제품인지 딸기향이 진하고 달콤해서 발라먹다 결국은 싹 다 비워버렸다.
모양도 이쁘고, 맛까지 좋으니 이런 시간을 갖게 해 준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까지 일었다. 나는 3시간 동안 앉아서 맛보고, 읽고, 바다를 바라보고, 마시기를 반복했다. 딱딱한 삶의 마디가 풀어져 여유가 깃든 것만 같다. 해운대에 애프터눈 티세트를 앞으로는 줄곧 즐길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