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다이어트
“수험번호 000번!”
“네... 넷...”
“음... 학생!”
“네... 넷...”
“어디 살지? “
“... 어... 저기...”
“집이 어딘가?”
“서울시... 은평구... 저기... 어...”
이곳은 눈이 펑펑 내리는 대학 입시, 면접장. 면접을 보는 교수와 지원을 한 고3 학생과의 질문과 답변들이다. 학생은 너무나 긴장해 있었고, 그것을 눈치챈 사려 깊은 교수는 학생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다른 질문들은 뒤로 하고 집 주소를 물어본다. 하지만, 학생은 끝내 집 주소를 기억해내지 못하고 꺼질듯한 목소리로 ‘서울시... 은평구...’ 까지만 대답한다. 도무지 무슨 '동'이었는지, 더군다나 '번지수'는 좀처럼 떠올리지 못한다. 이 사려 깊은 교수는 다른 질문들은 포기하고, 오히려 학생에게 괜찮냐고 걱정스레 물어보며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필자의 21년 전, 경희대 한의예과 지원 모습이다. 얼마나 긴장이 되었던지, 집 주소가 까마득했다. 면접을 마치고 눈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10번을 넘게 우리 집 주소를 또박또박 되뇌고 되뇌었다. 그리고 누구한테도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이다. 지금이야 이렇게 글감으로 꺼내놓을 수 있지만, 그때는 펑펑 쏟아붓는 눈에 묻혀서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었다.
세월이 흘러 집 주소도 말하지 못했던 필자는, TV나 라디오의 생방송을 하기도 하고 기업체나 문화센터 등에 초대받아서 몇백 명 앞에서 강의를 하고 춤 동작을 지도하기도 한다. 종종 사람들에게 어쩌면 그렇게 침착하게 말을 잘하냐는 얘기를 듣곤 한다. 그럴 때면 깜짝 놀라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난 말도 못 하고, 초긴장에, 실수할까 봐 전전긍긍하는데...’
우리들은 과거 속의 내 모습에 사로 잡혀있는 경우들이 많은 것 같다.
과거의 좋지 않았던 기억 하나로 현재의 달라진 모습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한두 번의 실수에 초점을 맞춰 나의 장점이나 잘했던 점들은 잊어버리고 현재의 내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이다. 실제 진료실에서 만났던 한 여성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누가 봐도 매력적인 날씬한 20대 후반의 Q는 다이어트가 필요하다며 찾아왔다. 바디이미지(신체상)가 왜곡되어 있어서 실제 자신의 체형보다 30% 정도 비만하게 보고 있었는데, 초등학교 4-5학년 때의 기억 때문이었다. 4학년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부모님 모두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을 나가시게 되었고, 늦은 시간까지 집에 혼자 있었던 이 소녀는 부모님을 기다리며 무서움과 외로움을 먹는 것으로 풀게 되었다. 라면을 끓여 먹고, 늦게 들어오시는 어머니가 부엌에 두고 가시는 간식비로 양 많은 과자를 사서 늦은 밤까지 먹고 먹고 했었다고 한다. 2년 동안의 일이었고, 이후로는 집도 안정이 되고 체중도 문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때의 기억을 안은 채 다이어트가 늘 요구되는 사람으로 살아오고 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왜 우리들은 쉽게 장점보다는 단점을, 기뻤던 일보다는 속상했던 일을, 행복했던 관계보다는 불행했던 관계에 집착하게 되는 것일까? ‘그때 참 잘했어, 그러길 잘했어!’라기보다는, ‘그때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그때 왜 그랬을까?’를 마음에 새기고 새겨서, 몇 년 몇십 년이 지나도 무서운 기억력으로 떠올리는 마는 것일까?
예전의 못났던 기억 하나가 떠오르면, 반대로 잘났던 모습을 어렵지만 끄집어내어 보자. 십몇 년 전에 실수했던 자신의 모습 때문에 현재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데 망설여진다면, 역시 멋지게 해냈던 사건을 찾아서 눈앞에 가져와 보자. 그래서 과거 속의 한두 사건에 매여, 현재의 내 모습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현재의 내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이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지나가버린 옛 것에 발목이 묶여서,
현재의 내 모습마저도 부정해버리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자.
그러면, 다이어트도, 인생 살기도, 한결 수월하고 유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