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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가 날 망치고 있는지도 몰라

내 인생을 갉아먹는 가장 우아한 중독

by Even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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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게 생기면 인생이 조금 피곤해진다.

나는 9살부터 여러 스포츠를 경험했다. 사람이 좋아서, 혹은 내가 잘하는 것 같아서 시작한 운동이 많다. 태권도, 사격, 유도, 수영, 서핑, 골프까지.







어릴 적 내 부모님은, 내가 유도를 배우고 싶다 하면 다음 날 손잡고 유도장에 데려가는 분들이었다. 내가 원해서 시작한 게 아니었던 것도 많지만, 그만큼 많은 기회를 주시려 애썼다. 스포츠뿐 아니라 미술, 음악, 영어, 피아노까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어떤 결핍 없이 살아가길 바랐던, 본인의 아쉬움을 딛고 내게 간이고 쓸개고 다 내주며 만든 기회였다.





그 덕분에 나는 도전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무엇이든 ‘한번 해보면 별거 아닐걸’ 하고 시작할 수 있는 용기. 그건 누구도 대신 줄 수 없는, 내 삶의 자산이다.




그런데 부모님의 돈이 아닌, 내 돈을 쏟아부어 다시 시작한 건 골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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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생각한다. 왜 다시 시작했을까.

누가 이런 나쁜 스포츠를 만든 걸까.

돈과 시간과 감정을 다 끌어다 쏟게 만든 이 운동을 왜 다시 손에 쥔 걸까.


어떤 날은 눈 깜짝할 새에 18번 홀까지 와 있고,

어떤 날은 5번 홀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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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생각이 많아진다.

‘이 잘 치고 싶다는 마음이 날 망쳤구나.’

‘이걸 잘 치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이렇게 목을 매는 거지.’




아주 가끔 이렇게 친다

혹은,

‘오늘은 정말 잘 쳤다. 나 정도면 대단하지.’

‘성장하고 있다. 멋지다. 힐링이었다.’

날씨도, 내 몸도 오늘은 날 위해 움직여줬다고.


운동인지, 집착인지.


비용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매해 쏟아지는 신제품들.

'관용성이 뛰어나다', '볼의 탄착군이 좋아진다'는 광고에 혹해

클럽을 바꾸고 또 바꾸고,

레슨은 ‘이번 달만’이라며 꾸역꾸역 예약한다.

열리지 않던 지갑이 골프 앞에선 자꾸만 열린다.


다른 데선 1불도 아끼려 애쓰면서도 말이다.



싱글플레이어도 이렇게 칩니다

하지만 돈보다 더 무서운 건, 내 기대치다.

몇 번 잘 친 뒤 등록된 핸디캡.

‘이 정도는 쳐야지’라는 기대가 마음에 박힌다.



난 프로도 아니고, 주 5~6일을 일하는 사람이면서

일주일에 하루, 이틀 치는 골프에 매일 같은 결과를 바란다.

그건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러나, 사람 마음이 그렇다.

‘그 홀에서 해저드만 안 갔어도’,

‘한 타만 줄였어도’라는 후회가 줄줄이 떠오른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집착이 좀 섞여 있는 게 사람냄새나지 않나?



이게 그렇게 쉬운 운동이었다면 내가 이렇게 빠졌을까?



어차피 돈 쓸 거면 마음의 불꽃이 활활 타오를 때 쓰는 게 맞다.

똥인지 된장인지 다 찍어먹어 보며

나만의 스윙, 나만의 리듬, 나만의 클럽을 찾으면 되는 거다.




그래도 좋은 골프





결국 모든 건 내 마음먹기 나름이다.

골프에 시간 쓰고 돈 쓰는 걸 내가 ‘가치 있다’고 느낀다면,

그 외의 부정적인 요소들은 의미 없다.


잘하고 싶은 게 있다는 건 열정이고,

그 열정이 식지 않았다는 건 아직 젊다는 거니까.

그것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을까.


내 인생을 갉아먹고 있는 이 우아한 취미, 골프는

오늘도 내 통장을 차갑게, 내 속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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