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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가든 101

특별한 일상

by 감기

농사는 할아버지댁에 가서 풍경으로만 경험하고 반려식물도 매번 죽여서 내보냈던 영락없는 도시인이었지만 단독주택에 살기 시작하면서는 다른 집의 조경을 훑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꿈이야 우리도 아름다운 영국식 장미 정원이나 싱싱한 채소들이 자라는 텃밭을 예쁘게 꾸며보고 싶지만 여름엔 덥다 겨울엔 추워서 밖에서 일하기 힘들다는 핑계, 그리고 영어표현을 빌리자면 "Green Thumb" (원예 재능을 일컫는 관용어) 이 없는 나에게는 그저 막연하기만 한 가드닝. 그래도 아이의 정서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몇 해 동안은 잔디용 자동살수장치가 되어있는 (물을 제때 줄 자신이 없음 ㅠㅠ) 앞뜰 자투리 공간에서 감자며 오이를 길러보았지만 우리 집 토질이 워낙 관리가 안되어 있(다고 생각했다)어 수확이 변변치 않았다.


문득 (농촌 출신이신) 부모님이 가끔 오실 때마다 잡초만 자라고 있는 집주위 공간들을 보시고 거름만 잘 주면 일 년 내내 채소걱정 없이 키울 텐데 놀리고 있다라며 안타까워하셨던 기억과 아이의 유치원에서 체험학습 프로젝트였던 박스에서 길렀던 채소들이 생각났다. 박스에 토질 좋은 흙을 넣어서 자투리땅에 설치하면 이번엔 제대로 된 텃밭을 가꿔볼 수 있지 않을까? 기성품을 구입하면 간단한 일이지만 가격이나 크기가 맞는 제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공구에 관심 많은 아이가 Nail Gun을 사달라고 조르던 터라 채소박스를 손수 만드는 조건으로 네일건 딜을 수락했다.


채소박스를 만드는 재료와 방법은 비교적 간단하다. 환경친화적인 박스를 만들기 위해 마감처리가 안되어 있고 해충에 강한 삼나무(Cedar) 재질의 울타리용 나무조각(19/32-in x 5-1/2-in x 6-ft Cedar Dog Ear Fence Picket) 6개를 구입하였다. Dog Ear (가장자리 모양을 낸 부분) 쪽을 사이즈에 맞게 잘라내고 4개는 그대로 사용하고 2개는 다시 반을 잘라서 짧은 쪽 4개로 만들면 직사각형의 박스를 만드는 기본자재가 준비된다. 1x1 각목을 높이에 맞게 잘라서 박스 모서리와 중간중간 덧데어 주면 더 튼튼한 박스를 만들 수 있으며 박스 바닥은 열어둔 채로 땅 위에 그냥 올리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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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아빠의 집안 수리 보수일을 돕고 있는 아이는 제법 능숙하게 여러 공구 (특히 새로 구입한 네일건 ㅋ)를 사용해서 뚝딱 박스를 만들어 냈다. 미리 사놓았던 화분갈이용 흙 세 포대를 채워 넣고 나니 그럴듯한 채소박스가 준비되어 모종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 벌써부터 삼겹살을 싸 먹을 깻잎과 샐러드에 넣어먹을 토마토가 무럭무럭 자라날 생각에 흐뭇하다.




IMG_0915.JPEG 모종을 막 심었을 때
IMG_1847.JPEG 참담한 현 상태 ㅠㅠ

네 달이 흐른 지금 우리 채소박스 상태다. 여름을 지나면서 마치 토토로가 밤새 키운 나무처럼 토마토들이 폭풍성장을 한 상태이지만 몇 차례 뿌리파리떼의 공격을 받아 시든 잎들이 보이고, 같이 심었던 고추와 파들은 토마토 나무(!)에 파묻혀 제대로 햇볕을 보지도 못한 채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 제대로 된 가드닝을 위해서는 순도 솎아주고 가지도 쳐주고 해충도 관리해야 하지만.... 역시 나의 엄지문제 (Green Thumb)로 정글이 되어버린 상태 ㅋ. 그래도 여름 내내 구멍 뚫린 깻잎과 자라다 만 고추, 나무(!) 크기에 비해서는 매우 절제된 수확량 덕에 아껴 먹었던 방울토마토까지 길러낸 채소박스. 괜찮아, 한 철을 견뎌내고 죽어나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어디냐. 내년에는 좀 더 잘해보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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