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와 기대, 그리고 환상.
10월의 교토 날씨는 딱 좋다. 가을에 접어들었으니 약간의 일교차는 생겼지만, 여전히 반팔 반바지로 선선하게 다닐 수 있는 정도의 기온이다. 그에 비해 해는 급격하게 짧아졌다. 오후 4시 반부터 5시 사이면 금세 하늘이 노을로 물들고, 5시 반쯤 되면 어두워지고 만다. 날이 좋은 만큼 곳곳에서 크래프트 맥주 행사도 자주 열린다. 유달리 관심 있는 분야인 만큼 부지런히 돌아다니려 애쓰고 있다. 최근에는 오사카 성 공원에서 열린 행사에 다녀왔다. 교토보다 도시인만큼 훗카이도, 오키나와 등 다양한 지역의 브루어리의 부스들이 있어 돌아다니는 재미가 있었다. 인생 처음으로 오사카 성에 왔을 때만 해도 내가 이곳에서 살 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는데. 어느덧 다음 달이면 이곳에 온 지 반년 차가 된다. 돌아갈 생각을 하면 벌써 조금 아득하다가도, 남은 반년 남짓을 어떻게 해야 더 야무지게 보낼 수 있을지를 자주 고민하게 된다.
좀처럼 환상을 멀리하는 편이다. 그래서 이상형이라든가, 롤모델을 특별히 결정해두는 일도 꺼려한다. 낙관을 업고 미래를 그리는 순간이더라도 몇 살에 어디에서 뭘 할 것이다 같은 일을 명확하게 결정해놓고 싶지가 않다. 그저 나에게는 '귀엽고 무해한 할머니, 교토에 집 있으면 좋고.' 정도의 문장이면 충분하다. 그래봤자 삶이며 사람은 결국 변수 투성인데, 멋대로 기대하고 마음먹어봤자 권리 없는 실망만 따라올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동시에 상대에게 언제고 낯설고 궁금한 존재이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나에게 환상을 갖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나를 언제고 궁금해해 준다면 기꺼이 일기장을 펼쳐 내 삶을 읽어주고 싶어 한다. 상대의 눈을 찬찬히 바라보며 그 사람의 이야기에 오래도록 귀 기울이는 일은 필시 애정을 기반한 일이다. 진심이 아니면 힘들다 느껴지고, 그래서 기껍다.
누군가를 바라보는 일은 그이를 나의 방식대로 오해하는 일이라는 글을 어디선가 읽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또한, 내가 사랑하는 상대의 이상적인 모습이 곧 상대 그 자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서로가 바라는 환상을 건네려 애쓰지만, 시간이 흘러 속살을 마주할 때면 서로에게 남기고자 했던 오해만이 남는 것이다. 관계의 시작부터가 오해를 품고 있는 것이라면, 부러 그 이상을 덧대고 싶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불가항력 같은 관계를 제외하고, 적어도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부터는 그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상대가 알려주는 선 안에서만 상대를 궁금해했고, 내게 보이지 않는 부분을 부러 억측하지 않았다. 혼자 지내는 삶이 익숙해질수록 스스로 약속한 일과를 해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금세 흘러 그 이상으로 상대에게 쓸 에너지가 이전 같지 않기도 했다. 들어본 적 없던 차갑다, 는 말도 종종 듣기 시작했다. 마냥 좋은 사람이고만 싶어 스스로를 옥죄던 학창 시절에 비하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든 무덤덤해졌고, 한편으로는 편안해졌다. 내가 가진 다정의 양이 한정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고, 최대한 그것을 잘 나눠 쓰기로 마음먹었다. 나를 상대에게 맞추지 않고도 각자의 모양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적당한 배려와 합의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그 '적당한 배려와 합의'를 위해서, 성격이든 의도든 부딪힐 것 같다면 무거워지기 전에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인지 마찰을 어떻게든 피해 가려는 사람들이 벅차다. 나 역시 관계에 있어서 부딪힘이 적은 편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내가 보통의 관계들을 그만큼 가까이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를 좋아하는 것과 내 마음 근처에 그 관계를 두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마음 가깝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은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언제까지고 상대가 내 곁에 있을 것이라는 기대. 내가 건네는 마음만큼 기꺼이 나에게 돌려줄 것이라는 기대. 상대가 내 마음 같지 않았을 때 몰려올 상실을 굳이 겪고 싶지 않다.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걸 인지하고, 그저 눈앞의 관계에 집중하고 싶다. 함께 있는 지금이 즐겁지만, 언제고 멀어지고 흐려질 수 있다는 마음으로 관계를 대한다. 그런 한정성에서 조금 더 산뜻한 배려며 다정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어려운 건, 그 보통의 관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상대가 나타났을 때이다. 내년을, 그 후년을 약속하고 싶어지는 관계에는 나도 별수 없이 기대를 갖는다. 기대를 갖는 순간 불안이 섞인다는 걸 알면서도 그리된다. 상대가 나에게 품는 애정이 눈에 보이니 자연스레 그 손을 잡고 응하게 된다. 그래서 이 기대에 따를 마찰과 상실을 애초에 감당하고 시작한다. 나도 내가 미워죽겠는 순간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순간이 있는데, 남이라고 온전한 납득이 가능할 리가. 가까워질수록 어떤 형태로든 부딪힘은 자연스럽게 생기는 일이니, 그걸 어떻게 맞춰나갈지를 함께 고민하는 방향이 관계의 피로도를 줄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상대와 한사코 가깝고 싶어 하면서도 마찰만큼은 외면하고 덮어두는 사람이 비겁해 보인다. 관계의 좋은 면만 보고 싶어 하는 동시에 상대에게 짐을 지우는 행동이라 느낀다. 모든 마찰을 '싸움'으로 치부한 채 무슨 일이라도 날 것 마냥 구는 게 결국은 그 관계를 그다지 안전하게 느끼지 않는다는 반증이 아닌가. 마음이며 에너지는 그새 옮아간다. 그 자신없음을 달래가면서까지 관계의 지속을 위한 합의를 해야 하는 순간을 떠올리면 속절없이 허무해진다.
관계에 기대를 않는 버릇은 내가 끊임없이 관계에서 나를 돌아보느라 정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 의사를 곧게 밝히려면, 내가 곧은 사람이어야 하니까. 적어도 내가 하는 말에 모순되지는 않도록 살고 싶으니까. 가까운 이와 다투기라도 한 날에는 그이와 잘 화해하기 위해, 혹은 더 잘 맞춰나가기 위해 애쓰는 것과 별개로 스스로를 헤집어가며 옳고 그른지를 따졌다. 잘 부딪히고 싶어 했지만 사실은 네 감정을 참지 못한 거 아니야? 네가 말하는 제대로 된 대화가 뭔데? 상대방 속도도 안 맞추고서는 너무 몰아붙인 건 아니고? 내가 낯선 이에게 건네는 다정과 가까운 이에게 건네는 애정의 형태가 짐짓 다르다는 걸 알고 있다. 내가 관계에 갖는 책임만큼이나 권리도 생긴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 사소한 일에 순간적으로 짜증이 치솟는 경험을 몇 번이고 했었다. 보통의 관계라면 화는 커녕 기분도 그다지 나쁘지 않을 순간에 무너지는 스스로가 생경하고 싫었다. 이전에는 내가 특정 관계, 특히 연인에게 유달리 서운해하는 것이 그 관계에 가진 애정에 상응하는, 별 수없는 마음이라고 여겼다. 나는 이 관계가 끝나면 몇 번이고 무너질 감당까지 하고 있는데, 이 작은 서운함도 몰라주는 상대가 외려 괘씸하기까지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몇 번의 연애를 끝내고, 어떤 감정은 아무리 포장해서 꺼내봤자 결국에는 상대도 나도 다치게 한다는 것을 학습한 이후로는 굳이 말을 꺼내지 않는 순간이 생겼다. 감정이 더 커지기 전에 최대한 빨리 꺼내두고 식히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 왔었지만, 잠시 시간을 두고 내 안에서 조용히 토닥이는 방법도 있다는 사실을 익히는 중이다. 그냥 그렇게 계속 스스로 싸우고 선택하며 배워가는 중이다.
기대나 오해나 결국에는 전부 환상 속에서 숨바꼭질을 하는 중 아닐까. 게임은 결국 끝나고, 모두는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환상이 걷히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고, 결국 바라봐야 하는 것은 사랑받고 싶어 하는 조그만 아이 같은 기대와 오해, 그 자체일 것이다. 그 친구들이 하는 말을 듣다 보면 말은 안 되더라도 귀여워서 그냥 안아주고 싶은 마음도 들 것이다. 덜 낭만적이겠지만, 그래서 덜 힘들 수 있다면 외려 서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힘이 생기지 않을까. 그리고, 별 낭만 없는 삶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결국 또 다른 낭만 아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