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4, 페루, 리마.
3대 가족 여행에서 나는 '의전의 여왕'이 되어야 했다.
일흔을 앞둔 부모님의 편안함과 네 살배기 딸의 즐거움을 동시에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임무.
그 첫 번째 관문은 새벽 4시에 시작된 페루 리마행 비행기였다.
휠체어 덕에 우선 체크인을 하고 겨우 자리를 잡은 공항 카페, 엄마가 드실 만한 샌드위치를 고르고 딸아이의 도넛을 챙기는 그 모든 순간이 나에겐 작전 수행과도 같았다.
<혼돈의 리마, 안식처를 찾다>
리마의 첫인상은 아찔한 차간 거리였다.
앞차 범퍼에 내 코가 닿을 듯한 10cm의 간격을 유지하며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비로소 남미에 왔음을 실감했다.
심장이 쫄깃해질 무렵 도착한 에어비앤비는 기대 이상이었다.
11층 창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근사한 풍경, 통창으로 들어오는 햇살.
그리고... 전기밥솥!
남미에서 전기밥솥을 보게 될 줄이야!
냄비밥을 지을 자신이 없던 내게, 밥솥은 문명의 불빛이자 구원이었다.
11층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며 용무를 볼 수 있는 통유리 화장실은, 이 안식처가 선사하는 묘한 보너스였다.
<보급 작전과 되찾은 일상>
낯선 도시에 뿌리내리기 위한 작전은 계속됐다.
남편과 나는 환전과 유심칩 구매라는 시급한 미션을 위해 길을 나섰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계산기를 두드려가며 환전을 하고, 숙련된 직원의 도움으로 인터넷 데이터까지 손에 넣자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임무가 남았다.
바로 엄마의 밥상.
우버를 타고 달려간 한인마트는 남아공 시골쥐에게는 신세계였다.
엄마와 장을 보다 주변을 둘러보니, 꼬마쥐가 할아버지 뒤를 금붕어똥처럼 쫓아다니며 사욕을 채우고 있다.
나는 괜히 한국과자를 만지작 거리다 엄마에게 핀잔을 들었다.
아무 것도 아닌 이런 평범한 순간들이 너무나 좋다.
<기대와 배신: 고양이 공원과 닭다리>
모든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듯 보였지만, 진짜 시련은 이제부터였다.
온종일 끌려다니느라 심통이 난 꼬마쥐를 달래야 했다.
나는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꼬마쥐, 고양이 보러 갈까?"
'고양이 공원'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케네디 파크.
내 머릿속엔 수십 마리 고양이들 사이에서 행복해하는 딸의 모습이 그려졌다.
하지만 공원엔… 고양이가 없었다.
사방팔방에 널부러져있을 거라던 기대와 달리, 고양이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고양이 공원에 고양이가 없다니 홍철없는 홍철팀도 아니고...
실망한 딸을 겨우 놀이터로 이끌어 진정시킨 후, 나는 엄마의 마지막 지령을 수행하기 위해 다시 마트로 향했다.
"내일 아침을 위해 생닭 한 마리를 사 오너라."
이쯤이야.
들어가자마자 냉장코너에 보이는 생닭 한 마리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숙소에서 포장을 뜯는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다리가… 없다.
닭다리가 안 보이게 웅크린 자세로 포장하는 페루의 기술에 감탄해야 할지, 가장 맛있는 부위를 도려내 간 그 대담함에 분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고양이가 없는 고양이 공원, 그리고 다리가 없는 닭.
리마는 내게 가르쳐 주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며, 가장 중요한 것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는 쓰라린 교훈을.
의전의 여왕, 리마 첫 날부터 처참히 패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