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구급 호구의 사막여행

Day 6. 이카, 와카치나 사막

by 다락방의 미친여자

나는 스스로를 안다.

나는 세계구급 호구다.

돈을 건네는 순간, 기분이 싸해지면서 방금 내가 호갱이 되었음을 깨닫는 그런 사람. 그래서 남미 여행을 앞두고 나는 치밀하게 정보를 수집했다.

특히 오늘부터 시작될 3박 4일간의 이카-나스카-파라카스 여정은 나의 정보력과 흥정 능력이 시험대에 오르는 첫 번째 관문이었다.




<계획은 언제나 계획일 뿐>
리마의 한인 민박에 커다란 짐을 맡기고 간소한 차림으로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평이 가장 좋은 '크루즈 델 수르' 버스를 예약했고, 블로그에서 봤던 '점심 샌드위치'를 굳게 믿었다.

"점심은 차에서 주는 걸로 먹을게요!" 부모님께 호언장담하고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왜 때문인지 그날 버스는 점심을 주지 않았다.

역시.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다.

다행히 엄마가 "혹시 몰라" 싸두신 주먹밥이 우리를 구했다.

엄마는 다 안다.


숙소 역시 나의 치밀한 계획의 산물이었다.

모기가 창궐하고 밤새 시끄럽다는 와카치나 오아시스 대신, 조용하고 깨끗한 이카 시내의 호스텔을 잡았다. 다행히 숙소만큼은 성공적인 선택이었다.

망고가 주렁주렁 달린 정원을 가진 숙소는 조식포함 1박 30$을 훨씬 뛰어넘는 가치를 지닌 곳이었다.




<기대하지 않았으나, 아름다웠던>
사실 와카치나 사막은 큰 기대가 없었다.

얼마 전 버기카 사고 소식도 들었고, 무릎과 허리가 좋지 않은 엄마를 모시고 괜찮을까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예전에 아빠가 사막을 보고 싶어 하셨기에, 사막에 가보기로 했다.

사막을 탐험할 작은 버기카에 올라 "아이도 있고, 부모님 연세도 있으니 살살 몰아주세요!" 기사 아저씨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시작된 버기카는, 정말이지, 상상 이상이었다.

깎아지를 듯한 모래 절벽을 롤러코스터처럼 내려꽂힐 때, 꼬마쥐는 비명을 지르며 웃었고 부모님도 아이처럼 즐거워 하셨다.

중간에 아빠 모자가 날아가는 작은 소동마저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지구가 침묵하는 곳>
우리는 다른 팀들을 피해 '카테드랄(대성당)'이라 불리는 거대한 모래 언덕으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한 순간, 나는 난생처음 '적막감'이 무엇인지 몸으로 느꼈다.

세상이 음소거 버튼을 누른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람 소리도, 벌레 소리도 없는 완벽한 침묵.

눈은 감으면 되지만 귀는 닫을 수 없는데, 이곳에서 처음으로 "귀가 쉰다"는 감각을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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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고요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게는 꼬마쥐가 있으니까.

녀석은 사방이 모래인 세상이 얼마나 신났는지, 신발을 벗어 던지고 모래 언덕을 기어오르고, 구르고, 급기야는 눈밭에서나 보던 '모래 천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우리 가족은 각자의 방식으로 사막을 즐겼다.

저 멀리 하얀 점이 되어 산책을 나간 아빠, 차에서 조용히 풍경을 감상하는 엄마, 그리고 보드를 타는 남편과 꼬마쥐.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편안한, 가족이기에 가능한 고요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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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의 귀환, 그리고 최고의 까르보나라>
아름다운 사막의 석양을 뒤로하고 오아시스로 돌아왔다.

이제 마지막 관문, 내일 나스카 투어를 위한 흥정의 시간이다.

나는 온라인에서 수집한 정보대로 인당 '90달러'를 외쳤다.

하지만 여행사 아저씨는 내일이 공휴일(성탄절)이라 그 가격은 안 된다고 했다.

그 말이 너무나 합리적이어서 나는 순간 납득해버렸다.

등 뒤에서는 부모님의 피로와 꼬마쥐의 칭얼거림이 압박해왔고, 결국 나는 인당 '100달러'에 서둘러 협상을 마쳤다.

돈을 건네자마자 기분이 싸해지는 걸 보니, 이번에도 나는 빼도 박도 못하는 호갱이 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숙소 근처에서 우연히 들어간 이탈리아 식당의 까르보나라가 기가 막히게 맛있었으니까.

계란 노른자와 치즈를 써 정석대로 만든, 페루에서 만난 인생 까르보나라였다.
10달러씩 더 쓴 호갱이 되었을지언정, 돈으로 살 수 없는 사막의 침묵과 가족의 웃음, 그리고 최고의 까르보나라를 얻었다.

어쩌면 이게 바로 '호구의 여행법'일지도 모르겠다.

조금 손해 보더라도, 그 이상의 행복을 발견하는 것.

나쁘지 않은 장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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