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8. 페루-나스카, 파라카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어린 시절,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시리즈를 통해 내 마음에 들어왔던 '페루 사막의 이상한 그림들'.
어린 시절 이 책을 참 좋아했는데, 특히 나스카 라인은 날 설레게 했더랬다.
설마 나스카 라인을 내 눈으로 직접 볼 날이 올 줄이야.
해가 뜨면, 빛 반사 때문에 그림이 잘 보이지 않는다길래 우리는 첫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부터 서둘렀다.
평생 멀미를 겪어본 적 없는 아빠와 나, 그리고 멀미쟁이면서도 멀미약을 그만 깜빡 잊고 안가져온 남편.
우리는 경비행기를 타고 나스카라인을 무사히 볼 수 있을까.
<호구가 타고있어요, 팩트폭격을 멈춰주세요>
셔틀버스 안에서 여행 시작 후 처음으로 한국인 청년들을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나는 그만 금단의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경비행기… 얼마 주셨어요?"
성탄절 연휴라 비싸다는 말에, 그리고 가족들의 무언의 압박에 인당 100달러에 딜을 했던 나.
청년들은 해맑게 대답했다.
"저희는 1인에 80달러요."
아아아아아.
안 들은 귀 삽니다!
머릿속에서는 '차액 20달러 x 3명 = 60달러'라는 계산이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애써 웃으며 "하하, 흥정 정말 잘하셨네요."라고 말하자, 그들은 결정타를 날렸다.
"아닌데요? 그냥 호텔 벽에 정가로 붙어있던데요."
으아아아, 그만해! 비행기에 오르기도 전에 내 멘탈은 팩트폭격으로 너덜너덜해졌다.
그래요, 내가 바로 국가대표 호구입니다.
<하늘 위, 경이와 멀미 사이>
공항에 도착해 몸무게를 재고 자리를 배정받았다.
무거울수록 앞에 태운단다.
그래서 나는 아빠와 함께 맨 앞자리에 탔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윽고 경비행기는 떠올랐고, 어린 시절의 꿈이 눈앞에 펼쳐졌다.
거미도, 우주인도, 어제 본 나무도, 소용돌이치는 우물들도.
내가 어린시절부터 수없이 봐온 경이로운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무척 감격적인 순간이야 할 것 같지만, 현실은 혹독했다.
라인을 잘 보여주기 위해 비행기는 왼쪽, 오른쪽으로 사정없이 동체를 기울여 운행하며 나스카 그림 위를 뱅뱅 돌았다.
놀이동산에서 뱅글뱅글 도는 놀이기구들을 색깔별로 다 타도 멀미 한 번 안 해본 나조차, 속이 부웅 뜨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내 뒤에서는… 남편이 토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창밖의 모든 라인을 눈에 담았고, 심지어 고프로로 영상을 찍었다.
"장모님이랑 꼬마쥐 보여줘야지."
나중에 비행기에서 내린 그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그 숭고한 사위 정신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티코 할아버지,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다>
비행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경비행기를 타지 않은 엄마와 꼬마쥐가 우리를 반긴다.
체크아웃을 기다리는 동안 아빠와 딸은 소파에 앉아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속닥거린다.
저 둘만의 세상.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파라카스로 가는 버스터미널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놀랍게도 나스카의 택시는 대부분 '티코'다.
한국에서 은퇴한 티코 할아버지들이 다 폐차된 줄 알았더니, 지구 반대편 페루의 시골동네 나스카에서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오늘 우리를 태워줄 택시는 그중에서도 유독 세상 풍파를 다 홀로 다 겪은 듯 낡고 낡았다.
인천상륙작전부터 살아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티코, 생각보다도 더 보통이 아니다.
발밑으로… 흙바닥이 보였다!
아저씨, 차바닥이 부식되어 구멍이 뚫렸는뎁쇼!
게다가 애저녁에 쇼바가 나가서 조금만 덜컹이면 차체가 부욱부욱하며 타이어랑 닿는 듯한 소리가 난다.
나는 이러다 차가 주저앉을까 걱정이되어, 괜히 엉덩이에 힘을 꽉 주고 내내 공중부양 자세를 유지해야만 했다.
<꼬마쥐가 발뻗고 누울자리는 할아버지 품>
바닥 뚫린 티코의 스릴을 뒤로하고, 우리는 무사히 파라카스에 도착했다.
세상건조한 사막지형이었던 나스카와 달리, 파라카스는 바다 내음이 물씬 풍기는 해변이었다.
꼬마쥐는 음식이 나오는 새를 참지 못하고 해변으로 달려 나갔다.
밥이 나온 후, 녀석을 부르러 간 할아버지가 갔다.
좀 전까지 쌩쌩하게 놀던 녀석이 "힘들어, 안아줘"라며 할아버지 품에 덥석 안긴다.
그리고는 나를 보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요 녀석. 할아버지 힘들다고! 니 발로 걸으라고!
하지만 아빠는 하나도 안힘들다며 기꺼이 안고 가신다. 나참.
요 쥐콩만한 녀석.
네 빽이 할아버지인 걸 아주 잘 아는구나.
<국가대표호구 결정전>
저녁을 먹고 나는 결전의 장소로 향했다.
다음 날 파라카스 국립공원 투어와, 점심 도시락 이 두 가지의 가격을 흥정해야 한다.
지난 번에는! 가족들이 배고프다 재촉하고 꼬마쥐가 칭얼거려 제대로 흥정에 임할 수 없었다.
나는 계백의 심정으로, 가족들을 모두 떼어놓고 투어사의 문을 두드렸다.
내가 원래 한다면 하는 사람이고, 똑순이다.
오늘 아주 제대로 흥정 할 생각이다.
조사해본 바에 의하면 국립공원 투어는 어느정도 정가가 정해져 있기에, 점심 도시락 가격을 깎는 것이 나의 목표다!
하지만 내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여행사 직원이 "우리 엄마가 정성스럽게 도시락을 만들어주는 건데, 그렇게 깎으면 나는 슬프다"라는게 아닌가.
나는 또다시 무너지고 말았다.
슬프다잖아. 엄마의 정성이라잖아.
그래, 정성에는 돈을 지불해야지.
나는 왜 흥정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가.
20달러 더 비싼 꿈을 꾸고, 바닥 뚫린 티코를 타고, 엄마의 정성에 마음이 약해지는 나.
어쩌면 이게 바로 나의 여행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조금 손해 보고, 조금 더 마음을 쓰는.
그래, '국가대표 호구'의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아하하하하하..
하지만 다음 흥정은 꼭 성공하고 말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