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9. 페루, 파라카스
파라카스는 '배낭여행자들의 갈라파고스'라 불린다.
갈라파고스의 열화판이라는 뜻일텐데, 이 별명의 타당성은 각자 판단하시길.
비교적 다양한 동물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갈라파고스에 비견된 것인데, 남아공에 살며 여행지에서 물개나 펭귄 등을 이미 봤던 우리 가족에게 동물 구경은 그리 매력적인 목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두 가지 명확한 미션이 있었기에 파라카스에 하루를 따로 할애했다.
첫째, 보트를 타야만 볼 수 있다는 파라카스 문명의 거대한 '촛대 그림'.
둘째, 파라카스 국립공원에서 볼 수 있다는 '화석'보기.
배를 타고 물개나 새, 펭귄 등을 보는 투어는 우리에겐 곁다리일 뿐이다.
보트 투어가 새똥을 맞거나, 동물 냄새로 힘들었다는 리뷰가 많았는데, 비위가 약한 부모님은 포기 선언.
남편과 나, 꼬마쥐, 우리 셋의 미션 임파서블이 시작됐다.
<미션 1: 새똥섬에서 촛대를 찾아라>
아침일찍 보트투어를 나서며 꼬마쥐에게는 "새똥섬에 간다"고 알려줬다.
직관적이고 알기 쉬운데다, 새똥 폭격에 대한 마음의 준비도 시킬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보트투어가 시작되는 부두에서 우리를 맞이한 건 그림책에서나 보던 펠리컨 군단이었다.
펠리컨이 대충 거위나 백조만한 크기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커서 정말 놀랐다.
지금까지 봤던 새 중에서는 펠리컨이 가장 큰 것 같다.
이 크기를 뭐에 비유해야할까.
1m는 족히 넘는 아주 커다란, 새 중에 코끼리 같은 느낌이었다.
만물의 영장으로서 위엄을 보이고 싶었지만 생각도 못한 크기에 조금 쫄아서 조용히 보트에 올라탔다.
'보트 투어는 왼쪽에 앉아야 한다'는 꿀팁을 알고 갔건만, 조금 늦게 도착했던지 줄 끝에 서는 바람에 남는 자리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괜찮다. 어차피 이 보트투어의 목표는 동물이 아니라 '촛대 그림'이었으니까.
촛대 그림은 거대한 크기이니까, 어디에 앉던 상관없이 잘 보일거다.
바다 위에 떠있기만 하면 된다.
얼마쯤 달렸을까. 거대한 모래 언덕 위로, 마치 거인 아이가 손가락으로 쓱쓱 낙서하고 간 듯한 거대한 촛대 그림이 나타났다.
팔파라인의 귀여움이나 나스카 라인의 정교함과는 또 다른, 원시적이고 거대한 아름다움.
보트 기사는 모든 승객이 충분히 볼 수 있도록 배를 이리저리 돌려주었고, 나는 만족했다.
일단 첫 번째 미션은 성공이다.
그 후 마주한 '새똥섬'의 실체는 상상 이상이었다.
섬 전체가 희끗한 배설물로 뒤덮여 있고, 그 위를 까만 점처럼 새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냄새 또한 명성 그대로였다.
극한 직업이 있다면, 저 섬에 상주하며 새똥 비료(구아뇨)를 채취하는 일일 것이다.
만 4살때 여행한터라 꼬마쥐는 남미 여행의 극히 일부만을 기억하는데, 아직까지도 이 새똥섬에서의 악취를 기억하니 말 다한 게 아닐까.
<미션 2: 박물관의 저주와 뜻밖의 위로>
보트 투어를 마치자마자 우리는 부모님과 합류해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내 화석 집착증은 재점화되었다.
"화석! 화석을 보고 싶어요!"
구글 번역기의 힘을 빌려 운전사 아저씨에게 몇 번이나 외쳤다.
파라카스 국립공원에서는 거대 메갈로돈의 화석도 발견되었다고 하던데, 아쉽게도 그건 멀리 있어 보러 갈 순 없다.
나는 그냥 평범한 조개라도 만족한다.
그냥 바위 틈에 박혀있는, 자연 속의 화석이 보고 싶을 뿐이었다.
화석이 보고 싶어 안달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운전사 아저씨는 파라카스 문화 박물관으로 인도했다.
마침 잘되었다.
리마에서 엘리베이터에 갇히느라 이 지상화를 그렸던 문명에 대해(그게 나스카던, 파라카스던 팔파던지간에!) 박물관에서 볼 수 없어 아쉬웠는데, 고고학적 갈증을 풀고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날은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이자 월요일.
월요일은 무슨 날?
전 세계 9할 이상의 박물관이 문을 닫는 날.
그렇다. 닫았다.
아아아아아아. 이번 여행과 박물관은 정말 지독하게도 궁합이 맞지 않는다.
내가 실망한 게 너무 티가 났는지, 운전사 아저씨는 우리를 국립공원 깊숙한 곳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풍경과 마주했다. 왼쪽으로는 끝없는 황금빛 사막, 오른쪽으로는 시리도록 푸른 바다, 사이엔 붉은 해변, 그 위로는 거짓말 같은 파란 하늘.
붉은 모래 해변(Playa Roja)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성당이나 건축물보다 대자연에 감동하는 우리 가족에게, 이곳은 그 어떤 박물관보다도 더 큰 울림을 주었다.
우리가 아름다운 자연에 반응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아저씨는 갑자기 국립공원의 길을 벗어나 사막을 달려 어느 풍광 좋은 언덕에 내려주었다.
이곳은 프라이빗 투어로만 갈 수 있는 곳이라며 자랑스러워하셨는데, 과연 그럴만했다.
끝없이 펼쳐진 파라카스 자연보호구역의 사막과 바다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는 곳이었다.
우리는 이 곳에서 산책하며 우리 가족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가장 소중한 것은 계획에 없었다>
불안하기 짝이 없게도, 투어가 다 끝나가는 시점까지도 아저씨는 화석 산지(?)로 우리를 데려가지 않았다.
버스 시간을 가늠할 때, 이제 정말 마지막 장소로 가야할 것 같은데, 아저씨는 우리를 어느 해변가에 내려주었다.
"화석은요? 제 화석은요?" 절박한 내 외침에 아저씨는 나가는 길에 볼 테니 걱정 말라며 웃었다.
걱정이 된다구요. 내 화석...
우리는 해변을 거닐며 조개껍데기를 주웠다.
아빠는 조개들이 다닥다닥 붙은 구멍 뚫린 돌을 들고 "이게 화석 같다"며 아이처럼 웃으셨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후, 나가는 길 드디어 진짜 화석을 볼 수 있었다.
왜 아저씨가 마지막에 잠시 들렀는지 이해가 가는 곳이었다.
10미터 정도 산책길이 나있고 그 좌우로 화석들이 바닥에 박혀 있었다.
처음에는 산책로를 따라 널려있는 오징어, 조개 화석들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지만.
사람 마음이 간사하게도 너무 흔해서일까, 아니면 한여름의 뜨거운 땡볕 때문이었을까.
나는 곧 심드렁해져서 얼른 차 안으로 도망가버렸다.
파라카스 국립공원은 사실 화석을 가장 기대하고 방문한 곳이었는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자연풍경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곳이었다.
<엄마의 정성과 버스의 배신>
투어를 마치고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어제 내가 흥정에 실패했던 바로 그 '엄마의 정성' 도시락을 까먹을 시간.
아보카도와 토마토, 계란이 듬뿍 들어가 터질 듯 뚱뚱한 샌드위치는 놀랍게도 정말 맛있었다.
그래, 이런 샌드위치라면 값을 깎으면 안된다.
나는 호구가 아니었어!!
하지만, 버스에 타자마자 점심 도시락이 또 나왔다.
지금까지 버스를 세 번 탔는데 두 번이나 도시락이 나온 걸 보면, 장거리 노선에는 도시락이 포함된 게 분명하다.
세 번 모두 같은 버스 회사를 이용했건만, 최장거리를 갔던 첫 날 왜 도시락을 안준건지 아직까지도 모르겠다.
역시 여행은 예측불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소소한 행복>
저녁 무렵, 우리는 다시 리마의 한인 민박에 도착했다.
엄마 아빠는 꼬마쥐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꼭 사줘야 한다며 우리를 이끌고 번화한 쇼핑몰로 향했다.
한국에서 이미 장난감을 한가득 짊어지고 오셨으면서도, 2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손녀에게는 뭐든 더 해주고 싶으신가 보다.
남미여행이 아직 30일이나 남았고, 이제 겨우 첫 나라 페루를 돌아다니는 중인데 자꾸 짐이 늘어난다.
오전까지만 해도 대자연의 품속에 있었는데, 눈앞에 펼쳐진 번쩍이는 도시 풍경이라니.
파라카스 국립공원에서의 감동이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꼬마쥐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인형을 선물 받고, 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달콤한 '스윗 그라나딜라'와 효도용 망고를 한봉다리씩 샀다.
기분 좋은 밤바람을 맞으며 민박으로 돌아오니, 마당에서는 삼겹살 파티가 한창이었다.
아이고, 저녁 먹으러 나가기 전에 물어볼걸!
하지만 괜찮았다.
오늘 하루가 유난히 길었던 우리에게는 요란한 파티보다 조용한 휴식이 더 필요했으니까.
1층 공용 공간에서 만화책 몇 권을 빌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내일은 드디어 세계의 배꼽, 쿠스코로 간다.
...과연 쿠스코로 가는 길은 호락호락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