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1 드디어 쿠스코!
어제저녁, 비행기 취소라는 폭탄을 맞고 호화로운 공항 호텔에서 잠들었지만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아침 7시 반 비행기. 5시에 일어나 조식당으로 내려가니 부모님은 이미 식사 중이셨다.
"저거, 저거, 저거."
부모님은 기미상궁이 되어 우리에게 '생존에 유리한' 그러니까 우리 입맛에 맞는 메뉴들을 알려주셨다. 그 든든함에 힘입어 우리는 무사히 식사를 마치고 이른 아침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오늘은 쿠스코에 갈 수 있겠지.
<작은 승리, 그리고 거대한 오판>
국내선은 한 시간 반 전에 도착하면 되겠지만 불안감이 우리를 일찍 움직이게 했다. 수속을 마치고 게이트 앞에 도착하니 6시. 비행기 시간인 7시 반까지 한 시간 반이나 기다릴 생각에 지루하던 찰나, 기적처럼 우리 이름이 불렸다. 6시 반 비행기에 빈자리가 났으니 지금 타겠냐는 것.
당연히 "네!"를 외쳤다. 빡빡한 하루의 첫 단추가 순조롭게 끼워지는 순간이었다. 이륙 전, 나는 비장하게 고산약을 입에 털어 넣으며 꼬마쥐에게 신신당부했다.
"이제 비행기에서 내리면, 산소가 부족해. 절대 뛰면 안 돼. 너는 이제부터 소피아 공주야. 사뿐사뿐 걷는 거야!"
그리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고산지대에서는 무리하면 안 되니, 일정을 여유롭게 잡은 건 정말 잘한 일이야.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고산에 적응하며 움직이자.' 이것은 이번 남미 여행 최대의 오판이었다. 고산지대는, 그냥 짧게 치고 빠졌어야 했다.
<비자 전쟁: 아이를 앞세워 승리하다>
해발 3,300m 쿠스코. 공항 계단 세 개를 오르는데도 숨이 턱까지 찼다. 결코 내가 살이 쪄서가 아니다. 씌익, 씌익. 쉴 틈도 없이 우리는 볼리비아 대사관으로 향했다. 12시에 예약된 셔틀을 타기 전 비자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대사관은 이미 한국인들로 미어터지는 전쟁터였다. 조그마한 2층 건물을 대사관저로 쓰는데, 비자 대기인원들이 대기실을 넘쳐 흘러 계단에까지 빼곡하게 들어찼다. 9시에 온 사람도 한 시간 반 째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단다. 망했다. 오늘 비자를 못 받으면, 인당 100불 주고 도착비자를 사는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대기실 한구석에 찌그러져 앉아 다른 여행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캐리어가 분실되어 신혼여행임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째 같은 원피스에 쪼리만 신고다닌다는 신혼부부. 맙소사. 그래도 그들은 씩씩하게 쪼리를 신고 해발 6,000m 비니쿤카에 올랐단다. 그 옆에는 세계를 배낭여행 중인 부부도 있었다. 역시 남미까지 오는 여행자들은 내공이 보통이 아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간식을 나눠먹으며 기다리다보니 벌써 12시. 10시에 도착했는데 두 시간이나 기다렸건만, 중국인들의 비자만 처리해주고 한국인들은 무한 대기 중이다. 나는 꼬마쥐를 꼬드겨 영사 방문 앞에서 데굴데굴 구르게 할까,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 영사가 나타나 대기실을 둘러보더니 꼬마쥐를 가리켰다. "거기 아이 있는 집, 이리 오시오." 아이 카드가 발동되었다. 남미여행을 하며 느낀건데, 유독 아이에게 친절하다. 고마운 순간들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먼저 온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안고 먼저 비자를 발급받았다.
그리고 남아공에서 생긴 버릇.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받은 서류도 다시 보기. 아니나 다를까, 꼬마쥐의 성과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문제는, 신청서에 그렇게 쓴 장본인이 바로 나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우리 편을 배신한 내부의 스파이였다. 이젠 어쩔 수 없다. 못먹어도 고. 이대로 국경통과하면 땡큐고 통과 못하면 100불 내고 비자를 새로 사면 된다.
<창밖의 유적, 그리고 꿈은 이루어진다>
숨 돌릴 틈 없이 숙소로 돌아와 엄마 아빠가 차려주신 점심을 허겁지겁 먹었다. 어제 쿠스코에 도착하지 못해 미뤄둔 셔틀이 도착해, 오얀따이땀보로 향했다. 다행히 고산 증세는 아직 없었다. 오얀따이땀보는 쿠스코보다 고독다 500m 낮으니 고산에 적응할 시간을 벌어주리라 기대하며 출발.
오얀따이땀보 숙소에 도착했을 때 유적지 입장은 이미 끝난 시간이었다. 하지만 괜찮다. 내가 이 방을 고른 이유는, 창문만 열면 오얀따이땀보 유적이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창가에 서서 개미처럼 유적을 오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음, 저거면 됐다!" 줌을 당겨 세세하게 살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녁은 호텔의 작은 유기농 뷔페에서 먹었다. 정갈하고 맛있는 음식들. 무엇보다 엄마가 편안하게 식사하시는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엄마 아빠는 저녁 산책을 나가시고, 남편과 꼬마쥐는 방으로 올라갔다. 나는 혼자 남아 내일 투어를 예약하고 도시락을 확인하며 '가이드'의 임무를 마쳤다.
어제 이 시간, 공항에서 발이 묶여 동동거렸는데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답다니. 모든 게 까마득한 옛날 일 같다. 내일은 드디어 마추픽추. 연애 시절 남편이 신혼여행으로 어디 가고 싶냐 물었을 때, 나는 마추픽추라고 답했었다. "살다가 우리가 마추픽추를 볼 날이 올까요?" 함께 웃으며 말했던 기억. 오리라 기대조차 안했던 그날이 정말로 왔다.
내일 부디 날이 좋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