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3. 페루, 쿠스코. 휴식일.
<쿠스코에서 쉬어가는 법>
여행 13일 만의 첫 휴식일이다.
고산지대에서는 무리하면 안 된다는 조언과, 일주일에 하루는 쉬게 해달라는 부모님의 간곡한 요청이 합쳐진 결과였다. 고산지대의 아침 공기는 한여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쌀쌀했다. 남편과 아빠는 에어비앤비에 놓인 페치카에 불을 지피느라 분주했고, 엄마는 불고기를 재웠다. 꼬마쥐는, 오늘도 할아버지 옆에 붙어앉아 아침 복숭아를 즐기고 있었다. 다행히 우려했던 고산 증세는 누구에게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나는 고산 적응을 위한 우리 가족만의 특효약을 준비했다.
두구두구두구… 그것은 바로, 쇼핑이었다.
진짜로. 엄근진. 참말로.
<고산병 잡는 알파카>
진담이다. 리마의 한인 민박 사장님은 고산병으로 죽어가던 손님들이 알파카 쇼핑을 하다 완치되는 기적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마침 이곳 페루는 남미 여정 중 기념품을 사기에 가장 좋은 곳. 나는 프로 가이드처럼 선언했다.
"여러분, 이제부터 쇼핑할 곳은 마땅치 않습니다. 후회하지 마시고 오늘 다 사셔야 합니다!"
엄마 아빠는 여행 경비와는 별도로 챙겨오신 달러를 주섬주섬 꺼내셨다. 우리의 목표는 단 하나, 알파카였다.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 근처에는 고급 알파카 브랜드 '쿠나(Kuna)' 매장이 서너개 있었고 우리는 각 매장을 다 둘러보기로 결의했다. 화창한 날씨를 즐기며 쿠스코 골목길을 걸어 첫 번째 쿠나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고산병 완치의 기적을 온몸으로 이해했다. 알파카 제품들이 한국의 3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인데, 여기에 연말 세일까지 더해져 안 사는 게 손해인 수준이었다. 이곳은 매장이 아니라 금광이었다. 고산병 따위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우리는 아르마스 광장 근처에 있는 쿠나 매장을 샅샅이 훑고 나서야 엄마와 아빠의 알파카 스웨터를 골랐다. 엄마는 자꾸 남편과 나에게도 사라고 권하셨지만, 남아공에서 무슨 알파카 스웨터까지냐. 알파카를 입을 만큼 추운 곳도 아니고, 믿고 맡길 드라이클리닝 세탁소도 마땅치 않다. 보나마나 신주단지 모시듯 하다가 좀벌레가 쏠아먹고 말거다.
시큰둥하니 영 쇼핑에 흥을 돋구지 못하는 나를 제치고 예상치 못한 쇼핑 메이트가 혜성처럼 등장했다. 바로 꼬마쥐였다. 꼬마쥐는 뭘 아는지 모르는지 할아버지 옆을 졸졸 따라다니며 "멋있다!"를 연발했다. 이 녀석, 아무래도 영업사원의 재능이 있는 것 같다. 남아공에서도 내가 옷을 사러 가면 꼭 따라와서 "엄마 예쁘다", "엄마 저것도 입어봐", "엄마 저거 써볼래?" 하며 옆에서 재잘거리는, 아주 든든한 쇼핑 메이트였다. 평소 같으면 자기 것도 사달라고 졸랐을 텐데, 솔 매장에는 성인 옷만 있고 어린아이 옷은 하나도 없더라. 다행이지뭔가.
쿠나와 솔 매장에서 엄마 아빠가 원하는 옷을 고르니 사이즈가 없었다. 우루밤바 매장에 있다는 말에 저녁에 다시 오기로 하고 아르마스 광장으로 향했다.
<갑자기 비, 갑자기 벌새, 갑자기 메로나>
만족스러운 쇼핑을 마치고 광장을 나서자마자,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쏟아졌다. 깜빡이도 켜지 않고 훅 들어오는 쿠스코의 변덕스러운 날씨. 원래는 광장 반대편으로 가서 그 유명한 12각돌도 보려 했건만. 소중한 알파카 옷님들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황급히 택시를 잡아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계획에 없던 이른 귀가 덕분에 우리는 뜻밖의 손님들을 만났다. 남편이 정원에서 벌새를 발견한 것이다! 우유병 솔처럼 생긴 주황색 꽃 주변을 맴돌며 꿀을 빠는 작은 생명체. 넋을 놓고 구경하는 우리에게 사진 찍을 틈도 주지 않고 날아가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장을 보러 간 마트에서는 더 기묘한 녀석을 만졌다. 과일 코너에 놓인, 연초록 바탕에 보라색 줄무늬가 있는 가지처럼 생긴 과일. 호기심에 하나 사 와서 베어 무는 순간,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신기하게도 '메로나' 맛이 났다. 물 많은 메로나 맛. 나중에 알고 보니 이름이 '페피노 멜론'이란다.
갑자기 쏟아진 비, 갑자기 나타난 벌새, 갑자기 맛본 메로나. 계획대로 되지 않았기에 더 즐거운 휴식일의 오후가 그렇게 흘러갔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 그럼 끝이 안좋으면? 그래도 좋기로 해요>
저녁이 되어 주문해둔 알파카 스웨터를 찾으러 다시 나섰다. 노란 가로등이 켜진 쿠스코의 골목길은 낭만적이었다. 남아공에서는 해가 지면 나갈 수 없었기에, 이 평범한 밤마실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옷을 찾고 아르마스 광장의 야경을 즐기는데, 딸아이의 패딩에 무언가 묻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누군가 뱉어놓은 침이었다. 순간, 즐거웠던 모든 감정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일부러 아이를 노리고 뱉은 것은 아니라고, 그냥 침을 자주 뱉는 문화인데 우연히 맞은 것일 거라고 애써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기분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완벽하게 행복했던 휴식일의 마무리가 씁쓸했다. 하지만 괜찮다. 내일은 쿠스코 근교 투어가 예정되어 있으니. 오늘처럼만 고산 증세가 없기를, 그리고 내일은 날이 좋기를. 그렇게 쿠스코의 밤이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