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스코의 산소도둑

Day 14. 페루, 쿠스코코

by 다락방의 미친여자

간밤에 부모님은 잠을 설치셨다.

엄마는 기침을 시작하셨고, 아빠는 오래된 부정맥 증세가 다시 나타나 숨이 답답하다고 하셨다. 해발 3,400m의 쿠스코. 고산병은 소리 없는 암살자처럼 스멀스멀 우리 가족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남미 여행자 카톡방에서는 창창한 젊은 여행자가 폐렴증세가 나타나 하산했다는 흉흉한 소식이 들린다. 어쩐지 마음이 오그라든다.


일단 움직이면 나아질 거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우리는 밖으로 나섰다. 오늘의 목표는 택시를 대절해 쿠스코 근교 유적을 둘러보는 것. 세계구급 호갱님답게 택시비 흥정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정신승리가 필요한 아침이었다.


<삭사이와망: 양치기 소녀와 인간 나침반>

쿠스코 근교투어의 첫 목적지는 잉카의 군사요새, 삭사이와망이다. 다큐멘터리에서 본 얄팍한 지식을 쥐어짜 내 가이드 흉내를 내보지만, 부모님의 궁금증을 풀어주기엔 역부족이었다. 벼락치기의 한계다.

무릎수술을 한지 얼마 안 된 엄마는 계단이 힘들어 평원으로 이동하고, 우리는 요새를 올라가기로 했다. 이따 유적의 끄트머리에서 다시 만나요.

건 절대 내가 살이 쪄서가 아니다. 고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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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하지 않게 슬금슬금 유적을 올라가니 건너편 유적도 보이고, 들쑥날쑥한 삭사이와망 유적 특유의 톱니모양 석벽들도 잘 보인다. 삭사이와망은 요새로서, 방어를 목적으로 이렇게 톱니처럼 만들었다는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고르게 뻗어있는 톱니모양 석벽들을 보니 요새로서의 기능도 기능이지만 참 멋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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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를 보니 저어기 밑에 엄마가 열심히 등산스틱을 짚고 걸어가시는게 보인다. 초원을 배경으로 모자쓰고 열심히 가고 있는 엄마가 어쩐지 양치기 소녀 같아 보인다. 엄마가 휠체어를 타지 않고 이렇게 함께 걸어서 여행할 수 있는게 어쩐지 간질거리게 기쁘다. 줌으로 땡겨서 엄마를 한 장 더 찍어두고 우리는 유적을 더 올라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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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사이와망의 제일 위쪽으로 오르자 쿠스코 시내의 전경이 보인다. 우리 숙소가 어딘가....찾아보려했는데 전혀 모르겠다. 사실 나는 세계구급 호구이기도 하지만, 또 몹시 뛰어난 길치이기도 하다. 때문에 어디가 어딘지 1도 모르겠다만, 생체 나침반을 탑재하고 있는 아빠는 방향과 주요건물들을 통해 우리 숙소를 금새 특정해낸다. 가이드는 내가 아닌 아빠가 했어야 했다.


꼬마쥐는 슬슬 삭사이와망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한테 반지사탕 하나 얻어먹고 잠깐 괜찮아졌는데, 시한 폭탄에 불붙인 느낌이다. 삭사이와망에 야마들이 돌아다닌댔는데....야마! 야마는 어딨는거야!!!

애석하게도 건너편 유적동산 꼭대기에 꿈지럭대는 야마가 보인다. ....아아아 여기도 좀 와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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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유적에 흥미를 잃은 꼬마쥐는 힘들다며 냉큼 할아버지에게 안긴다. "야, 이놈아! 할아버지 고산병 오면 어쩌려고! 당장 내려와!!" 라고 엄히 말해봤으나 소용없다. 2년 만에 만난 손녀의 애교에 아빠는 그저 흐뭇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삭사이와망의 톱니 아래쪽으로 내려와보니 삭사이와망의 석벽을 쌓은 돌 하나하나의 규모가 엄청나다. 왠만한 성인 키만한 돌들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도대체 그 옛날에 이 거대한 돌들을 어떻게 이 산꼭대기까지 갖고 온거지? 인민의 피 땀 눈물.... 자. 이젠 우리의 양치기 소녀 엄마와 합류하여 다음 유적으로 넘어갈 시간이다.


<탐보마차이: 가끔 어떤 것들은 적당히 모를 때가 신비하고 좋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내가 가장 기대했던 탐보마차이.

잉카인의 수로기술도 신기하고, 이 물들이 어디서 나오는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도, 그 어떤 극심한 가뭄에도 물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그 모든게 신기해서 너무너무 보고 싶었더랬다. 물이 마르지 않는 신비한 수로 유적이라니.

탐보마차이는.... 일단 의외로 입구에서 유적까지 멀다. 막 한시간씩 걸리게 먼 것은 아닌데, 그래도 한 십 분은 올라간 것 같다. 이게 고산증세 때문에 별 것 아닌 오르막도 힘들게 느껴진다. 바닥이 울퉁불퉁한 돌바닥인데다 오르막이라 엄마가 스틱짚고 걷기 힘들어 엄마는 유적 보기를 포기하셨다.

한 십 분정도 오르막길을 올라 거대하고 신기한 아스테반의 황금도시와 거대한 댐 및 수로유적이 나오면 참 좋겠지만... 실제로 보면 얘걔...싶은 작은 유적이 하나 남아있다. ;ㅁ;

내가 이걸 보려고 고산증과 싸워가며 십 분 오르막길을 올랐나 자괴감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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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보마차이보다 더 큰 문제는 먹구름이었다. 갑자기 마른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우리는 구름에 쫓기듯 다음 유적지인 켄코로 향했다. 거대한 바위 제단을 5분 만에 둘러보고 나오자마자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마지막 코스인 코리칸차는 포기. 한국인들은 설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비맞으면 안된다는게 관광학계의 점심 아니겠는가. 오늘의 쿠스코 근교 투어는 여기까지 하기로 한다.


<쿠스코의 산소도둑: 적은 내부에 있다>

고산지대에 비가 내리고 나니 집안에 냉기가 돌았다. 비가 오니 싸늘해서 우리는 또 난로를 때우기 시작했다. 산소가 모자라 고산증을 겪고 있었으면서, 산소를 태우는 난로를 피우는 악수를 두었고.. 그 결과 온 식구가 두통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ㅁ;)

모르겠다 이게 정말 난로를 태워서 온 두통인지. 하지만 나는 난로에 혐의를 두고 있다.

난로가 들으면 억울하겠지만, 여튼 산소도둑은 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빨래방에서 세탁물을 찾아왔는데 엄마의 핑크색 패딩이 누렇게 타서 나왔다. 가슴 한복판에 선명하게 찍힌 다리미 자국. 엄마는 쿠스코 동네 빨래방에 맡긴 본인 잘못이라며 탄식하셨다. 아마 산소가 부족해서 우리 뇌가 제대로 된 판단을 못 했나 보다. 뭐든지 기승전-산소 탓이다.


그날 밤, 엄마의 기침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아빠가 밤새 뒤척이지 않기를, 내일은 부디 모두의 컨디션이 괜찮기를. 고산의 밤은 기도와 함께 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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