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7 팔파, 나스카
나스카는 아빠의 '원픽'이었다.
엄마의 꿈이 이과수였다면, 아빠는 평생 책에서만 보던 신비의 지상 그림을 직접 보는 것이 소원이셨다.
처음에는 왕복 14시간의 거리와 악명 높은 경비행기 멀미 때문에 망설였지만, 결국 우리는 아빠의 꿈을 따라나서기로 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전혀 다른 풍경을 마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의 꿈과 딸바보의 배신>
사실 나에게는 나만의 '원픽'이 있었다.
바로 익살스럽고 귀여운 그림체의 '팔파 라인'.
잉카 시대의 나스카라인은 평지에 그려져, 하늘 위의 신이 보시라고 바쳐진 그림이라 해석된다.
반면 그 앞시대의 팔파 라인은 산비탈에 그려져, 땅의 인간들을 위해 존재했다고 여겨지는데 나는 이 팔파라인들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이 귀여운 그림체를 보라!
특히 이 팔파라인의 이름은 "가족".
삼 대가 여행하는 우리 가족과 함께 꼭 이 팔파 라인 앞에 서고 싶었다.
이 팔파라인을 보기 위해 우리는 버스가 아닌 택시를 대절해, 마침내 국도변의 팔파 라인 전망대에 섰다.
"아, 앓다 죽을 내 팔파 라인!" 나는 온전히 감상에 빠져들었고, 남편에게 이 역사적인 순간을 사진으로 남겨달라 부탁했다.
그리고 여행이 끝난 후, 나는 기대감에 부풀어 메모리 카드를 열었다.
그 안에는… 하이패션 화보를 찍는 듯한 딸의 기묘한 포즈 사진만이 가득했다.
내가 애타게 찾던 팔파 라인은, 딸 뒷편 저 멀리 배경에 간신히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걸 찍어달라고 한 게 아니잖아요!" 내 원망 섞인 외침에 남편은 그저 허허 웃었다.
이 딸바보 같으니라고!
<아빠의 꿈-나스카 라인 지상전망대>
아빠의 꿈인 나스카 라인 전망대에 도착했다.
내일 아침일찍 경비행기를 타고 나스카 라인을 보긴 할 건데, 꼬마쥐는 어려서 경비행기를 탈 수 없고, 엄마는 멀미가 심해 타시지 않겠다 하셨다.
그래서 맛보기로 나스카 라인을 경험하기 위해 전망대에 올라 나스카 라인 중 "나무"를 보기로 했다.
그런데, 나에겐 지금껏 겪은 그 어떤 액티비티보다도 이곳이 가장 무서웠다.
전망대가 너무 낡았어!
길 건너편에 튼튼한 새 전망대가 보였는데 야속하게도 아직 완공되지 않아 다음 달부터나 쓸 수 있단다.
육중한 내가 발을 디딜 때마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삐걱거리는 낡은 철제 계단.
성인 허리춤까지 오는 난간은-철망으로 막혀 있긴 했지만-호기심 많은 네 살배기 딸이 쏙 빠져나버릴 수 있을 것처럼 너무나도 넓어 보였다.
내가 어떻게 될까봐 무서운게 아니라, 꼬마쥐가 떨어질까봐 불안했다.
평생 높은 곳을 무서워한 적 없었는데, 자식이 생기니 별게 다 무서워진다.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딸의 손을 꽉 잡고 허둥대는 내 옆에서, 아빠는 나스카 라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계셨다.
<그날 밤, 진짜 나스카를 만나다>
그날의 진짜 풍경은 관광지가 아닌, 허름한 숙소의 수영장 옆 작은 테이블에 있었다.
낮에 엄마가 체한 것을 뒤늦게 알게 된 나는, 속상한 마음에 애플망고를 깎아 내밀었다.
남아공에 사는 나에게 망고는 겨울의 귤 같은 녀석이라 감흥이 없지만, 부모님은 망고가 비싼 한국에서 사시지 않던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하시는 걸 알기에, 망고라도 원없이 드시라며 부지런히 애플망고를 사다 날랐다.
나는 평소 망고를 양쪽으로 크게 잘라내고 씨는 귀찮아서 버린다.
그걸 보더니 아빠가 망고 씨를 그냥 버린다며 아깝다고 발라 드시겠다 하고, 나는 여기 발라놓은 살만 드시라며 투닥거렸다.
2년 만에 만난 아빠와의 사소한 실랑이가 정겨웠다.
그날 밤, 엄마와 남편, 딸이 잠든 후, 아빠와 나는 풀장가에 앉아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문득 아빠가 툭, 한마디를 던지셨다.
"꼬마쥐 잘 키워라. 뭐, 자식이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다마는."
그 순간, 모든 풍경이 하나로 합쳐졌다.
어릴 적엔 무섭기만 했던 아빠.
사춘기 땐 세상에서 제일 미워했던 아빠.
어느새 나는 그 아빠와 함께 여행을 와서, 자식 키우는 일에 대한 조언을 듣고 있었다.
엄마처럼, 아빠처럼 살지 않겠다며 발버둥 쳤던 어린 시절을 지나, 이제는 부모님의 반만이라도 닮고 싶다며 존경하는 성인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남편은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남편에게 가장 중요한 풍경은 고대의 지상 그림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서 웃고 있는 자신의 딸이었을 테니.
아빠의 꿈을 보러 떠난 길 위에서, 나는 아빠의 마음을 보았고, 남편의 시선을 이해했으며, 엄마가 되어버린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팔파와 나스카에서 내가 진짜 봐야 했던 그림은, 사막 산비탈이 아닌 바로 내 옆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