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3
열 시간의 비행 끝, 상파울루 과를류스 공항에 내리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숨통을 막았다.
건조한 열풍 같던 남아공의 여름과는 결이 다른, 끈적한 습기.
같은 남반구건만 남아공과 브라질의 여름은 이토록 달랐다.
‘아, 이제 정말 다른 세계에 왔구나.’ 몸이 먼저 알아차린다.
낯선 질감의 공기와 귓가를 맴도는 알아들을 수 없는 포르투갈어.
남미가 우리 가족에게 건네는 첫인사였다.
<설렘과 배신>
1.
비행기 연착이 잦은 남미에서 라탐항공만큼은 남미의 대한항공이라했다.
부모님과 브라질에서 만나기로 한 나로서는 일정이 뒤틀어지는 위험을 피하고 싶었기에 비싸더라도 라탐의 티켓을 살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반쪽의 성공이었다.
라탐은 정시에 출도착이야 해줬다만, 어린이 기내식도 장난감도 제공하지 않았다.
대한항공이라기보다는 중소(中小)한 항공이랄까.
2.
10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브라질의 첫 호텔은 공항 근처에 잡았다.
1박에 5만 원인데, 무료 공항 셔틀은 물론 조식까지 제공하는 가성비 호텔이었다.
다만 처음 안내 받은 방은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았고, 방을 바꿔달라고 프런트에 이야기하러 갔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프런트 직원이 영어를 그야말로 하나도 하지 못해서, 방번호 조차도 전달할 수가 없었다.
막연히 관광지와 호텔에서는 영어가 통할거라 생각했던 내 예상이 처음부터 와장창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당황한 나와 달리 직원은 태연히 구글 번역기를 켰고, 나는 깨달았다.
40일 간의 남미일정 동안 영어로 소통하기는 틀렸다.
누굴 탓하겠는가.
남미에 오면서 포루투칼어/스페인어를 배워오지 않은 내 탓이다.
3.
첫날 밤, 목이 마르다는 꼬마쥐에게 비싼 미니바 음료수를 꺼내주며 신신당부했다.
“이거 엄청 비싸니까 다른 건 절대 먹으면 안 돼!”
이틀 뒤, 한국에서 막 도착한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자마자 꼬마쥐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할아버지! 여기 있는 건 비싸서 먹으면 안 돼요!”
세상에, 나의 얄팍한 가르침이 이렇게 민망한 자랑거리가 될 줄이야.
<경고 신호>
1.
여행이 시작되었다는 진짜 신호를 감지한 건, 연달아 터진 두 번의 아찔한 사고 덕분이었다.
어찌저찌 에어컨이 잘 되는 방으로 바꾸고 나니, 비행의 피로와 긴장이 풀리며 우리 부부는 3인실의 침대에 늘어져있었다. 꼬마쥐는 심심했던지 각 침대에서 베개를 가져다 탑을 쌓고 놀고 있었다.
그러다가 꼬마쥐가 그 탑 위에 올라가려 했고, 그만 나동그라져 협탁에 뒤통수를 찧었다.
쉬고 있던 나를, 비명같은 아이의 울음이 후려쳤다.
아이를 품에 안아 달래는 그 짧은 순간 밀려오는 후회와 자책이라니.
다행히 별 탈 없었지만, 말도 안 통하는 낯선 땅에서 아이가 크게 다칠 뻔했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2.
다음 날, 꼬마쥐에게 약속했던 실내 놀이동산으로 향하던 길.
휘황찬란한 놀이동산의 불빛에 넋을 놓은 사이, 아이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발을 헛디뎌 구르고 말았다.
옆에 있던 남편이 재빨리 일으켜 세웠지만, 터져 나온 아이의 울음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정신 똑바로 차려!”
남미가 내게 보내는 두 번째 경고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완전체>
1.
셋째 날 아침, 나는 홀로 상파울루의 과를류스 공항 게이트 앞에 서 있었다.
인천에서 달라스를 거쳐 브라질 상파울루까지의 머나먼 비행길을 잘 오셨을까.
초조한 마음으로 입국장을 바라보던 그 순간, 엄마 아빠가 나타났다.
스물 여섯 시간의 비행에도 지친 기색 없이, 건강한 모습으로.
호텔에 도착해 짐을 푸는데 꼬마쥐에게 주시는 선물이 줄줄 나온다.
꼬마쥐 젤리, 꼬마쥐 사탕, 꼬마쥐 레고, 꼬마쥐 인형.
40일 간 남미를 돌아다녀야 하니 짐을 간소하게 챙겨 오시라 신신당부했건만, 트렁크 하나가 모두 꼬마쥐 선물이다.
이걸 왜 다 가져오셨냐고 눈을 뾰족하게 뜨고 잔소리를 하려 하자 "우리 짐은 이것밖에 없어"라고 하시는데 정말 본인들 짐은 단출하기 그지없다.
손녀가 뭐길래 조공을 이역만리까지 지고 오셨습니까.
꼬마쥐는 신나서 입이 찢어져 내려오질 않는다.
이 녀석, 이 년만에 만난 하미하비에게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엄마의 잘못을 고해바치기부터 한다.
"엄마가 안 놀아주고 저 혼자 놀다가 침대에서 떨어져서 여기 아야 했어요."
"엄마가 에스컬레이터 탈 때 손 안 잡아줘서 굴러 떨어져 다칠 뻔했어요."
야이야이야이 이 고자질쟁이야!!!!!!!!!!!!!!!!!!!!!!!!!!!!!!!!!!!!
2.
그날 저녁, 우리는 호텔 근처의 어설픈 일식집에 둘러앉았다.
부모님은 “맛있다, 맛있다” 하시며 즐겁게 드셔주셨다.
그게 나를 안쓰러워하는 마음에서 나온 선의의 거짓말이었다는 건, 다음 날 아침 엄마의 방에서 나온 컵라면 잔해를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영어도 안통하건만, 어떻게 뜨거운 물을 얻어다가 컵라면을 드셨다.
나보다 낫다.
새싹 가이드의 서툰 안내에도 그저 웃어주시는 부모님.
이제야 비로소 우리 가족은 완전체가 되었다.
기다려줘요, 페루.
기다려줘요, 마추픽추.
내 꿈의 여행지들.
서투른 가이드와 서툰 여행자들의 진짜 남미 여행은, 이제 막 시작이다.